조금 늦게 태어난 게 뭐가 어때서?

백지혜 2021. 3. 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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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생 부모의 초등학교 입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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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혜 기자]

"너는 엄마 자격도 없어."

첫째를 낳고 엄마로서 모든 것이 처음인 내게 친정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뱉은 말이다.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첫째 아이를 낳은 날이 12월 29일. 그러니까 그 3일을 못 버텨서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더 먹게 만들었냐는 핀잔에서 나온 말이었다.

첫째 시운이는 원래 예정일보다 닷새나 넘도록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버틴다고 해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산부인과 의사는 뱃속에 양수가 줄어들어 아이가 위험할 수 있다며 겁박하듯 유도분만을 추천했고, 유도제를 맞고도 10시간이 넘도록 출산 기미가 없어 결국, 제왕절개를 했다.

모든 것이 억울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꺼이꺼이 울음을 멈추기도 전에 수술실에 들어갔다. 뱃속의 양수를 마신 건 내가 아니라 시운이었다고. 내가 못 참은 게 아니라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 건 의사였다고! 그런 나보고 엄마 자격을 마음대로 박탈 시켜 버리다니.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하원 길에서 시운이가 대뜸 물었다. "엄마 나는 왜 친구들보다 키가 작아?"
ⓒ pixabay
 
그로부터 여섯 해가 지나고, 처참했던 첫 번째 출산 패배를 까마득하게 잊어가던 어느 날. 하원 길에서 시운이가 대뜸 물었다.

"엄마 나는 왜 친구들보다 키가 작아?"

심장이 철렁. '올 것이 왔구나. 언젠가는 묻겠지 하고 짐작은 했지만 당황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넘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준비해온 수많은 날들이 말짱 도루묵이 됐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첫째의 질문에 나는 저절로 쪼그라들었다.

그 후로도 시운이는 친구들과의 놀이규칙에 서툴러 "친구들이 나랑 안 놀아줘요"라고 말한 적도 있고, 또 어느 날은 "애들이 날 자꾸 놀려요" 그러다가 또 어떤 날은 "한글공부가 하기 싫어요"라고 말했다. 연속으로 날아오는 어퍼컷에 정신이 혼미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한 심호흡을 몰래 숨어서 하곤 했다.

또래 아이들보다 많은 면에서 한참 뒤처진 시운이가 내가 없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좌절을 맛보고 있을지 짐작도 어려웠다. 친정엄마가 괜히 했던 말이 아니었구나. 앞으로는 더없이 많은 경쟁에서 가지각색의 시련들을 겪을 텐데, 그때 난 또 뭐라고 해야 하나.

교육전문가들은 6, 7세가 되면 자연스럽게 또래들과 차이가 좁혀질 거라고 하던데, 그건 그 사람들 이야기지. 막상 현실과 마주하는 아이들은 여러 번 주저앉고, 부모들은 숱한 밤들을 머리에 쥐가 날 만큼 고민하며 잠들었을 거다.

아니 잠깐만. 이건 나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잖아? 공범이 있잖아.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남편의 생일도 사실은 12월 30일. 그는 이미 자신의 경험을 말미암아 시운이에게 틈틈이 꽤 괜찮은 조언과 설명을 해오고 있었다.

"응~ 그건, 시운이가 겨울에 태어나서 그래."
"아, 그래?"
"봄에 태어난 친구들이 있고, 여름에 태어난 친구들도 있잖아?"
"응."
"시운이는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직 키가 덜 큰 거야. 앞으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열심히 뛰어놀다 보면, 친구들만큼 키가 커질 거야. 그러니까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알았지?"

휴우. 다행이다. 키가 좀 작으면 어때. 남들보다 좀 느리면 뭐 어때. 역시 경험치를 무시할 순 없다. 남편은 이미 다 계획이 있었구나. 나만 괜히 쫄았네.

그저 내 아이의 속도에 발 맞출 뿐인데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동화책을 술술 읽어 나갈 때 시운이는 기역, 니은, 디귿을 공부했고, 친구들이 그림일기를 써나갈 때 시운이는 더듬더듬 책을 읽었다.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데, 영어는 무슨. 수학도 이제 100까지 셀 수 있는 단계다.

"야, 너는 너만 글 쓴다고 그러지 말고, 시운이한테 신경 좀 써!"

친구들이 더 성화다.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운이를 두고 한글도 쓸 줄 모르고 영어공부도 시키지 않는다고 구박이 끊이질 않는다. 아이들 공부보다 내 일과 능력 계발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날 범죄자 취급했다. 시킬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시운이의 속도에 발을 맞출 뿐이다.

아직 열 걸음밖에 떼지 않은 아이에게 스무 걸음이나 앞서 나가 있는 나를 따라오라고 채근하면 그게 과연 좋은 교육일까. 다그친다고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즉에 했겠지. 누구보다 아이를 걱정하는 사람은 난데 도대체 다들 왜 그러는 거야? 아이가 원해서 하는 거면 다행이지만, 그게 부모 욕심에서 비롯되는 거라면 나는 반대다. 친구들 따라가야 되니까 억지로 등 떠밀다시피 이것저것 시켰다가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를 나중에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내일이면 첫 등교를 앞둔 시운이에게 학습지를 권유하는 지인들의 연락이 끊이질 않는다. 10년 동안 연락 없던 예전 직장 선배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공짜로 책을 보내주면서 예비 초등학생을 겨냥한 준비학습 방법들을 즐비하게 늘어놓는다.

"초등학교 1학년부턴 신경 많이 써 줘야 해~ 너, 고교 학점제 시행된다는 얘기 들었어? 그게 뭐냐면 있잖아..."

선배는 고등학교 과정을 위해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애를 두고서 말이다. 혹하고 관심을 보이는 제스처가 없으니까 한술 더 뜬다.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남들은 다 시작하는데, 한가롭게 그러고 있을 거야?"

한글을 떼지 않고 학교를 보낸다고 내가 무심한 엄마가 될 줄이야.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다고 심지어 나를 강심장인 엄마로 만들 줄이야. 자기 의견 분명히 말할 줄 알고, 남의 말 경청할 줄 알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그 나이에 맞는 행동으로 밝게 자라면 되는 거 아냐? 정말 내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12월 30일에 태어난 남편도 누구보다 훌륭한 아빠가 됐고, 매사에 한 박자하고도 반이나 더 느리게 살던 나도 세 아이의 엄마로, 글 쓰는 작가로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늦게 태어난 것이, 느리게 나아가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오답이라고 한다면? 글쎄.

조금 느리면 느린 대로, 더듬거리면 또 그 나름대로 자신의 속도를 익혀 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 더딘 자신을 스스로 느낄 때가 되면 남들보다 더 오래 준비하고 부지런히 쫓아가면 되지. 넘어지고 다치는 과정에서 또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 '누가 그거 몰라?! 내 새끼가 안 다치고, 안 속상하면 좋잖아!'라고 말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아이가 넘어지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면 되고, 지치면 잠시 앉아 등을 토닥여주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부모의 자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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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아이셋 워킹맘의 미친 세상 이야기)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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