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시시각각] '한국 방파제론' 일본에 안 통한다

남정호 2021. 3. 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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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위협될 거라는 인식 커져
현 정부, 일본 환심 사기에 골몰
현실적 대안만이 관계 풀 수 있어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요즘 한·일 외교가에서 벌어진 희비극은 최악의 양국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얼마 전 도쿄·서울에 각각 부임한 강창일,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신임 대사 모두 상대국 정상은커녕 외교 수장조차 못 만나고 있다.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가 정권이 위안부·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불만으로 강 대사의 외상·총리 면담을 미루자 한국도 똑같이 나온 결과다.

이런데도 현 정권은 일본 측 환심 사기에 골몰한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지난해 11월 한 국제회의 모두발언에서 “특히, 스가 총리님 반갑습니다”라며 친한 척했다. 올 1월에는 위안부 판결을 두고 “곤혹스러운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어제 3·1절 연설에서도 “역지사지로 머리를 맞대면 과거 문제도 풀 수 있다”며 화해에 방점을 뒀다. 2년 전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일본 측 보복 조치에 “이번엔 절대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결기는 흔적도 없다.

강 대사는 일본 도착 후 “천황폐하께 가서 신임장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그는 과거 “한국에선 일왕이라 부르자”고 역설했던 장본인이다. 두 사람에게 ‘토착왜구’란 비판이 안 쏟아지는 게 이상하다.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씨는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천황폐하’라 했다 큰 곤욕을 치렀다.

현 정권 출범 이래 많은 전문가는 대일관계 개선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요즘 문 정권의 언행은 안도감은커녕 꽤나 거슬린다. 일본 본연의 중요성을 깨달아서가 아닌, 도쿄 올림픽을 남북관계에 이용하려는 정략적 술수로 읽히는 탓이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어제 연설에서 “올 도쿄 올림픽은 한·일, 남북, 북·일, 그리고 북·미 간 대화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여기에는 한·일 관계를 풀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요구도 작용했을 터다. 이에 현 정권은 미국 압력을 통해 한·일 관계 개선을 노린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도 국회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 미국 압박 카드가 통할까. 요즘 “바이든 측이 일본에 짜증을 낸다”는 이야기가 워싱턴에서 들린다. 한·일 관계 개선 요구를 일본이 안 듣기 때문이라는 거다. 일본은 2015년 당시 조 바이든 부통령 중재로 위안부 문제에 한국과 합의한 바 있다. 바이든은 훗날 “한·일 간의 이혼상담사 같은 노릇을 했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하지만 결과가 어땠는지는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현 총리가 누구보다 잘 안다.

여기에다 한국의 안보상 중요성을 보는 일본의 눈이 달라졌다. 과거 일본은 한국을 북한의 위협에서 막아주는 ‘방파제’로 여겼다. 1980년대 노신영 전 총리가 내놓은 ‘방파제론’은 나카소네 정부가 차관 40억 달러를 내는 데 힘이 됐다. 2년 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논란으로 한·일 관계가 틀어지자 문 대통령이 방파제론을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이 논리는 색이 바랬다. 지난해 말 일본에서는 리처드 롤리스 전 미 국방부 부차관의 글이 화제였다. 그는 한반도 미래에 대해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첫째로 핵보유국 행세를 하는 북한에 남한이 정치적으로 종속되거나, 둘째로 남한이 한·미 동맹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 핵무장을 추구하거나, 셋째로 남북이 느슨한 연방제 형태로 갈 것으로 봤다. 어떤 경우든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핵 위협을 받게 돼 중거리 핵전력(INF)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요컨대 한국이란 방파제가 없어질 테니 독자적 억제 능력을 갖추라는 얘기였다.

이렇듯 요즘 일본에서는 한국을 방파제로 여기는 분위기는 사라졌다. 대신 미국·호주·인도와의 4개국 협의체 쿼드(QUAD)로 위협을 막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정세를 꿰뚫지 못한 채 미국 압박이란 케케묵은 수법을 쓴들 쉽게 통할 리 없다. 문 대통령이 언급했듯, 역지사지에서도 고려할 수 있는 해결책 제시가 한·일 관계 개선의 첫걸음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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