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공주의 로맨틱한 사랑? 실제 상황은 살벌했다
[김종성 기자]
▲ KBS2 <달이 뜨는 강>의 한 장면. |
ⓒ KBS2 |
세상을 떠난 뒤에 그는 무덤 위치를 근거로 평강(平崗, 언덕 강)으로도 불리고 시호를 근거로 평원(平原)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그의 군주 생활은 평(平)이란 글자가 주는 이미지와 거리가 있었다. 온달이 혜성처럼 나타나 서쪽 국방을 안정시킨 뒤로 심적 부담을 다소 덜기는 했지만, 그는 그때까지의 역대 고구려 군주들보다 훨씬 더한 불안정에 시달렸다.
고구려왕의 불안함
그런 그의 처지가 KBS2 사극 <달이 뜨는 강>에도 어느 정도 반영됐다. 구체적인 스토리는 작가의 상상력에 따른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그의 처지를 상당히 불안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드라마 속의 평강태왕(김법래 분)은 심리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좌불안석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귀족들이 태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국정을 자기들 뜻대로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15일 방송된 제1회 초반부에서는 귀족들이 사병을 이끌고 궁궐까지 무단 진입해서 태왕을 압박하는 장면이 있었다. 방송이 5분을 경과한 대목에서, 귀족 정치가들을 따라온 사병 부대들이 태왕 집무실 앞에 진을 치고 격투기 시합을 벌이는 장면이 나왔다. 태왕과 왕실의 권위를 짓밟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사병들이 격투기 시합으로 시간을 때우며 소란을 피우는 동안에, 집무실에서는 최대 부족인 계루부의 고원표(이해영 분)가 다른 두 부족 수장들과 함께 평강태왕을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고구려를 구성하는 5부 중에서 세 부족이 태왕의 권위를 정면으로 무시했던 것이다.
압박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느낀 평강태왕은 소금 전매권을 세 부족에게 영구히 귀속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귀족들을 쳐다본다. "하여, 사병을 이끌고 와서 나를 겁박하는 건가?"라고 반문하며 귀족들이 건넨 문서를 땅바닥에 집어던진다.
귀족 수장인 고원표는 문서를 집어든 뒤 태왕이 있는 어좌로 태연하게 올라간다. "수결해 주시죠. 지금의 고구려를 지탱시키는 힘이 누구에게 있습니까?"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결국 평강태왕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광개토태왕이나 장수태왕의 이미지를 근거로 고구려 군주의 위상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고구려 태왕의 실제 위상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위의 드라마 장면은 귀족들에게 억눌린 고구려 임금의 처지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제5편 고구려의 전성시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고구려는 원래 1인 전제주의의 나라가 아니라 귀족 공화제의 나라였다. 국가의 기밀사항도 왕이 단독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왕과 5부 대신들의 회의로 결정했다. 형벌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에 따라 처리했다."
역대 고구려 군주들이 처한 이 같은 상황은 평강태왕에게도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귀족들에게 억눌린 채 태왕 역할을 수행했다. <달이 뜨는 강>의 평강태왕은 문서를 집어던지고 화를 내는 방법으로 귀족들에게 불만을 표출했지만, 실제의 평강태왕은 그런 소극적 저항마저도 꿈꾸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런 내부적이고 고질적이었던 문제에 더해, 평강태왕은 대외관계에서도 상당한 애로를 겪었다. 대외관계에서 그가 받은 압박은 그때까지의 고구려 군주들이 겪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있었던 중국의 분열에 힘입은 측면도 있다. 고구려가 만주를 지배한 원동력 중 하나는, 통일왕조가 등장하기 힘들 정도로 중국의 혼란이 극심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589년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로, 뒤이어 당나라가 재통일한 이후로 고구려의 위기가 가중되다가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도 '중국의 분열과 고구려의 성장'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관계를 반영한다.
평강태왕이 고구려를 이끈 기간은 559년부터 590년이다. 중국대륙이 분열기에서 통일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에 나라를 운영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최대 위협은 북중국 왕조인 북주(北周)의 팽창이었다. 북주의 기운은 수나라로 이어져 중국 통일로 이어졌다. 평강태왕은 그 같은 북주의 기운을 막고자 또 다른 북중국 왕조인 북제(北齊)와도 외교를 강화하고 남중국 왕조인 진(陳)과도 유대를 강화했다. 동시에, 북주를 상대로도 사대외교를 통해 평화적 제스처를 보냈다. 중국과의 전쟁을 막는 것이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는 최대 현안이었다.
▲ '달이 뜨는 강' 평강과 온달의 사랑 윤상호 감독과 김소현, 지수, 이지훈, 최유화 배우가 15일 오후 비대면으로 열린 KBS 2TV 새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강> 온라인 제작발표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달이 뜨는 강>은 고구려가 삶의 전부였던 공주 평강과 사랑을 역사로 만든 장군 온달의 운명에 굴하지 않은 순애보를 그리는 퓨전 사극 로맨스 드라마다. 15일 월요일 밤 9시 30분 첫 방송. |
ⓒ KBS |
또하나의 위협
그렇지만 전쟁을 막기 위한 평강태왕의 '평화 프로세스'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577년에 북주가 고구려를 침공한 것은 그의 평화 외교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다행히 그 직전에 전국사냥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온달이 북주의 침공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 이에 힘입어 중국의 동진(東進)을 '일시 멈춤'시킨 고구려는 그 뒤 10여 년간 중국과의 관계에서 여유를 갖게 있게 됐다. 온달의 활약 덕분에 이처럼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중국과의 관계는 평강태왕에게 항상 커다란 짐이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의 공세도 대단했다. 약소국 신라의 국격을 업그레이드시킨 진흥왕이 평강태왕과 동시대 인물이었다. 진흥왕은 540년부터 576년까지 신라 왕위를 지켰다. 두 사람의 재위 기간은 559~576년의 17년간 겹쳤다.
그 17년 동안에 진흥왕은 대가야를 흡수하고(562년), 함경도 방면으로 영토를 넓혔다. 한국사 시간에 자주 나오는 황초령·마운령 순수비 건립(568년)도 이 시기에 있었다. 진흥왕이 남과 북으로 영토를 팽창하면서 고구려 영토를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강태왕이 느꼈을 심리적 압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종전에 약소국으로 치부했던 신라가 이처럼 강대해졌으니, 그가 자괴감을 느끼는 시간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중국의 분열 시대가 이로써 끝났다. 이는 평강태왕의 고민을 한층 더 심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온달 덕분에 중국의 동진을 차단한 고구려는 이로 인해 한층 더 불확실한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이런 형세가 조성되지 지 얼마 되지 않은 590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재위기간 내내 중국과 신라 때문에 위축됐던 평강태왕은 집안 문제로도 적지 않은 번민을 겪었다. 실명이 알려지지 않아 후대 사람들이 아버지 칭호를 따라 평강공주로 기억하게 될 그의 딸이 결혼 문제로 가출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연애결혼을 규제함은 물론이고 서로 다른 신분 간의 결혼도 제재했던 그 시절에, 그의 딸은 공주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평민 남성과의 자유 결혼을 추진했다. 당시로서는 쉽게 용납되기 어려운 혁명적 발상을 가진 이 공주는 아버지와의 정면충돌도 불사했다. 그것도 '바보'로 소문난 평민 남성과 결혼하겠다면서 그렇게 했다.
신라 진흥왕으로 인한 고민 못지않게 그로 인한 평강태왕의 고민도 컸다. 공주는 결국 아버지를 버리고 온달을 찾아갔다. 그 '덕분에' 결과적으로 동화 속 임금이 되기는 했지만, 평강태왕의 처지는 낭만적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작가이자 아내이자 엄마, 그녀는 어쩌다 '투사'가 됐나
- 부모 이혼 후 불안한 금쪽이, 오은영이 '안전벨트' 강조한 까닭
- 또다시 BTS 공격한 중국인들이 간과한 중요한 사실
- 바보 온달의 마지막 선택은 정말 바보짓이었을까
- "동남아 7개국서 영감"... 디즈니에 숨결 넣은 '한국인'
- 8개월간의 고군분투...'백파더' 백종원의 약속 지켜지길
- 4년 전 윤종신의 '선택'이 가져다 준 어마어마한 결과
- 여성이 사라진 세상에 남은 남성들... 저주가 시작됐다
- "첫 촬영에 입술 터져"... '간이역' 손현주의 예능 도전기
- "의견은 안 주고 돈만..." 콘텐츠들 넷플릭스로 몰리는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