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도깨비불

강기헌 2021. 3. 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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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헌 산업1팀 기자

“고요한 담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캄캄한 어둠 밖에는-물론 파란 도깨비불도 없다. (중략) 도깨비면 도깨빈가 보다 하고만 생각하여 두면 그만이었지마는 그래도 그것을 그렇게 단순하게 썩 닦아 버릴 수는 없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1907~1942)은 1928년 발표한 『도시와 유령』으로 등단했다. 강원도 평창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일제강점기 도시 빈민의 삶은 도깨비와 닮은 그 무엇이었다.

도깨비불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진 아득히 먼 옛 얘기이자 추억이다. 농경사회에서 빈번하게 출현했던 도깨비불은 사라지고 거의 없다. 도깨비불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그중 하나는 도깨비불이 볏짚으로 만든 초가집 화재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초가집은 화재 위험이 높아 불이 붙으면 마을 전체가 잿더미로 변할 수 있다. 도깨비불이 사회적 터부(taboo)로 인식된 것이다. 도깨비불은 사람과 씨름하는 설화와도 연결된다. 도깨비를 이기려면 왼쪽으로 잡아 틀어서 넘어뜨려야 한다. 씨름에서 지면 죽지는 않지만 밤새도록 끌려다녀 정신을 잃어버린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선조들을 떨게 했던 도깨비불은 인(燐) 성분이라는 게 일찌감치 증명됐다. 인 화합물이 물과 작용해 분해될 때 생기는 인화수소는 상온에서도 불이 붙는다.

사라졌던 도깨비불은 최근 다시금 등장했다. 첨단 기술이 집결된 ESS(에너지저장장치)와 전기차에서다. 2017년부터 이어진 ESS 연쇄 화재에 이어 전기차 코나 화재도 정부가 화재 원인을 콕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리튬이온 배터리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국토교통부는 리튬이온 배터리셀 불량을 화재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재현 실험에선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관련 업계는 도깨비불이란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배터리 화재사고는 증거마저 불에 타기 때문에 원인 규명이 쉽지 않다. 그런데도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진 건 두 사건이 비슷한 패턴으로 전개돼서다. 정부가 화재 원인을 대략 짚어 발표한다. 이에 해당 기업이 반발한다. 한발 물러선 정부가 추가 조사를 진행한다. 실력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한계에 다다른 걸까.

강기헌 산업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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