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정부 구매는 기술혁신과 신산업 창출의 씨앗

2021. 3. 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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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혁신기술, 정부 조달 속에 성장
중국 풍력에너지, 공공구매 큰 도움
혁신기술, 치열한 축적 과정 거쳐야
국가적 과제 해결에 우선 지원 필요


혁신기술과 정부의 역할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하자마자 1조9000억 달러의 경기부양책을 포함하여 경제를 살리기 위한 여러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중 취임 후 곧바로 서명된 ‘바이 아메리칸’이라는 제목의 행정명령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정책을 계속 뒤집고 있는 와중에도 이 정책이 이전 정부의 산업정책을 계승한 몇 안 되는 사례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그 제목이 시사하듯 앞으로 모든 연방정부 기관들이 민간기업으로부터 물건을 구매할 때 미국의 제조기업들이 만든 것을 사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2019년 한 해 동안 연방정부가 조달한 제품 및 서비스가 600조원이 넘는 규모였는데, 이 엄청난 구매력을 미국 기업에 쓰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책은 선거가 한창이던 2020년 7월 바이든 캠프의 핵심 경제공약으로 먼저 제시되었는데, 취임 후 곧바로 행정명령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국제무역 규범과 충돌하는 부분은 없는지, 관세 동맹국은 어떻게 대우할지 등 실무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들이 많지만, 정책의 동기와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국민의 세금으로 미국 기업을 살리고, 그 결과로 미국인들의 소득을 올리자는 것이 당장 눈에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그 숨은 이면에는 정부 구매력이 중장기적으로 미국 산업 생태계의 근간인 제조업을 살리고, 나아가 청정에너지 등 미래산업 분야를 키워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략적 공감대가 깔려있다.

정부 구매가 기술혁신과 신산업 창출의 씨앗 역할을 해 온 것은 더는 비밀이 아니다. 에디슨이 백열전구 발명을 완성한 후 첫해에 만든 4000개의 전구는 거의 모두 공공기관에 납품되었다. 정부 구매의 인증 효과와 조달수익이 후속 기술개발의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실리콘밸리의 형성이나 반도체나 GPS·인터넷 등 첨단기술의 탄생 역사에서는 미 국방부의 전략적 구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미국 교육부가 학교 교실에 애플 컴퓨터를 선도적으로 보급한 덕분에 애플이 초기 성장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들어 상업용 위성 발사 시장에서 재활용 로켓이라는 혁신적 개념설계로 절대 강자의 위치에 오른 스페이스 X도 마찬가지다. 2002년 회사를 설립하고, 기술개발을 시작했으나 실패를 거듭하던 중 미 항공우주국(NASA)의 한발 앞선 조달이 ‘키다리 아저씨’의 역할을 했다. 준비한 자금이 거의 바닥난 2006년 무렵 나사가 몇 년 뒤 올릴 위성의 운송서비스를 전제로 2억7000만 달러 이상의 조달계약을 맺어주면서 도전적 시행착오를 계속할 수 있었다. 결국 2015년 그간 바다에 버려지던 추진체를 최초로 착륙시켜 재활용하는 혁신적 기술을 성공시키게 된다.

축적의시간 그래픽=신용호

아이폰5 모델에 장착되어 인공지능 비서 개념을 최초로 선보인 시리(Siri) 기술도 알고 보면, 2003년 미 국방부의 인사관리 등 여러 과업에 인공지능을 도입하기 위한 기술개발 프로젝트로부터 시작됐다. 이 문제를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한 민간 전문가 집단이 해결했고, 그 후 조금씩 개선된 기술을 2010년 애플이 2억 달러에 인수하여 아이폰에 장착한 것이다.

선진국들의 사례를 끝도 없이 들 수 있지만, 최근 들어 가장 두드러지게 이 정책을 구사하는 곳은 단연 중국이다. 풍력 등 중국 청정에너지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중국 정부와 공공기관의 구매정책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도 공안과 국방부문의 구매가 긴요한 초기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2018년 1만6000대의 모든 시내버스를 전기차로 운영하게 된 중국의 선전시는 전기버스 제작회사들에 귀중한 테스트베드를 제공했고, 그 힘에 기대어 기술력을 키운 중국의 전기버스는 어느새 한국 시장에서 무시 못 할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선진국 정부가 민간의 첨단기술과 제품에 세금을 쓰는 것은 혁신기술의 탄생 비밀과 관련이 있다. 혁신적인 기술은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첫 번째 버전을 만들어 적용하고, 다시 두 번째 버전으로 개선해나가는 스케일 업 과정, 즉 치열한 축적의 과정을 거쳐야 탄생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과 위험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기업들은 그리 많지 않다. 정부 구매는 기업 입장에서 매출이 생기는 효과뿐 아니라 공공부문에 사용됐다는 인증 효과까지 있어 스케일 업에 결정적인 뜀틀 구실을 한다. 더 불확실하고 도전적인 제품일수록 스케일 업의 위험과 비용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민간기업이 혁신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상황에서 정부 구매력의 혁신유인 효과가 빛을 발한다.

정부가 혁신적인 기술과 제품을 채택하게 되면 정부 서비스 수준이 높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장기적이고 구조적으로 예산을 절감하는 효과도 있다. 또한 기후변화나 디지털 전환, 보건 문제, 교육 혁명 등 정부의 고민 속에 산업의 지형도를 바꿀 미래 기술의 싹이 숨어 있다. 이것이 선진국이 정부의 구매력에 주목하는 이유다.

우리나라에도 정부의 구매력을 활용해 국민의 편익을 높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만들어간 사례들이 적지 않다. 70년대 중반 국민들이 전화기를 신청하고도 2~3년씩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통신산업의 근간인 전전자교환기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칠전팔기 끝에 개발된 교환기는 당시 공기업이던 한국통신이 선도적으로 구매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상식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천지개벽할 즉시 개통의 시대가 이렇게 열리면서 통신복지의 수준이 극적으로 높아졌다.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전전자교환기 기술이 90년대 중반 이후 CDMA 기술의 세계 최초 상용화와 그 이후 이어진 한국 휴대폰 산업의 성공 스토리에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주춧돌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기업들이 탄생했고, 귀한 인력들이 키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바이오 기술로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는 청년 벤처기업가의 이야기도 화제다. 불가사리는 우리나라 연안 생태계에 연간 3000억원 이상의 피해를 주는 골칫덩이다. 수거해서 소각하는데 정부예산도 투입하고 있다. 이 불가사리의 뼈를 활용해 친환경 제설제를 만들었는데, 제설성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고질적인 차량 하부 부식문제를 방지하는 효과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제설제의 최대 수요자인 지자체가 구매해주지 않으면 그저 흥미로운 벤처 아이템 중 하나로 묻힐 것이 뻔했다. 다행히 혁신적 제품을 정부구매로 이어주는 정책의 도움을 받아 여러 지자체에 공급될 수 있었다. 이 기업은 이제 인증 효과와 공공 매출을 바탕으로 더 높은 수준의 기술에 도전하고 있다. 글로벌 친환경 화학소재 회사를 꿈꾸고 있는 26살 청년 창업가의 결기가 대단하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국민의 세금으로 해양환경을 보호하고, 불가사리 수거에 들어갔을 불필요한 예산을 절감했으며, 글로벌 시장을 지향하는 혁신적 기술기업의 싹이 튼 데다가, 고용까지 늘어났으니 1석 4조 이상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과거 한국의 산업정책은 추격에 유리한 특정 산업을 정부가 지정하고, 기술·자금·공장부지 등 필요한 것들을 기업에 직접 자원하는 방식이었다. 빠른 추격의 시대, 그 어느 국가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기술혁신을 위한 정부와 민간의 역할이 선진국형으로 변할 때가 되었다. 정부는 국가적 도전 과제와 공공 서비스 혁신의 고민이 담긴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문제를 발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기업은 그 해법을 내기 위해 혁신기술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래 산업의 싹이 움트도록 해야 한다. 정부의 문제 출제와 민간의 해법 제시 사이에 있는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정부의 구매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혁신 지향적인 정부 구매는 추격국가를 넘어 선도국가를 지향하는 이 시점에 필요한 정부-민간 협력형 산업정책이라 할 수 있다. 중소기업 지원정책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이라서 지원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과제를 혁신적인 제품과 기술로 해결함으로써 세금 낸 국민에게 직접 혜택을 돌려주는 기업을 우선 지원해야 한다. 눈을 돌려보면 환경·교육·보건·치안·국방 등 각 분야에서 민간의 혁신적 기술을 도입해 해결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 도전과제들이 차고 넘친다. 이제 정부의 막대한 구매력을 어떻게 혁신기업의 도약 발판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댈 때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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