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은 '더치' 퇴근은 '눈치'..어제 온 신입이 또 그만뒀다

박건 입력 2021. 2. 28. 09:01 수정 2021. 2. 2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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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제60화>
중소기업 직장인 '나의 하루'
웹드라마 '좋좋소'의 면접 장면. 사장은 별안간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다. 유튜브 '이과장' 캡처

취업 시장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던 29살 취업준비생 조충범씨. 우여곡절 끝에 무역회사 '정승네트워크'에서 면접을 보기로 했습니다.

"오늘 면접이 있었어요?" 사무실 한가운데, 의아해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그. 뒤늦게 등장한 사장은 면접은 뒷전, 자기가 '삼전'을 때려치우고 맨땅에서 회사를 일군 무용담을 늘어놓습니다.

"취미에 노래라고 적혀 있네요?" 일장연설을 끝낸 사장이 대뜸 묻습니다. 순식간에 면접장이 노래방으로 변신합니다. 깜빡거리는 형광등을 조명 삼아 랩까지 선보인 충범씨는 그렇게 '산지직송' 합격 통보를 받습니다.

지난 1월 유튜브 채널 '이과장'에 올라온 '좋좋소' 시리즈의 한 장면입니다. 가상의 중소기업에 담긴 서글픈 일상을 깨알같이 보여준 웹드라마죠.

'좋좋소'의 댓글창에는 자기 직장생활을 보는 것 같다며 공감하는 반응이 대다수다. 유튜브 '이과장' 캡처

한 회당 8분 남짓한 이 짧은 영상에 많은 직장인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내 직장생활이 떠올라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올 것 같다'는 댓글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죠. '미생이 드라마라면 좋좋소는 다큐멘터리'라는 반응도 나옵니다. 5부작 시리즈의 전체 조회 수는 600만 회를 돌파했죠.

그런데 말입니다. 정승네트워크 신입사원의 비애, 과연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일까요. 밀실팀이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현실의 조충범'들을 만나봤습니다. 아래는 직장인 유튜버 늪84(활동명·37)와 여프리(활동명·29)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하루입니다.(※PTSD 주의)


중소기업 11년 차, 김 과장의 하루

직장인 유튜버 '늪84'의 출근길 모습. 유튜브 '늪84' 캡처

"카톡~" 오전 8시, 바쁜 출근길에 메신저 알림음이 울린다. 새로 만들어진 단톡방에 정 대리가 메시지를 올린다.

"어제 회식 정산하겠습니다~대리는 3만원, 과장급 이상은 5만원이고요. 오늘 중에 저한테 현금으로 주시면 됩니다 :)" 익숙한 상황이지만 오늘따라 힘이 빠진다. 내가 원했던 회식도 아닌데 더치페이를 해야 한다니! 대기업 다니는 지인 얘기로 회식은 회삿돈으로 맛있는 거 얻어먹는 날이라던데…. 우리 사장이 본인 카드 쓰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그리고 왜 우리는 현금으로 돌려줘야 하나.

출근 후 첫 일과로 사무실 청소를 하고 있다. 유튜브 '늪84' 캡처

오전 9시, 출근 시각 맞춰 회사에 도착하니 이 부장이 빗자루로 사무실 바닥을 쓸고 있다. "오늘 청소하는 날인데 일찍 안 다니냐"며 면박을 준다. 속으로 욕을 하며 걸레로 서랍 위를 닦기 시작했다.

못 보던 사람이 옆에서 대걸레질하고 있다. 그저께 새로 입사한 A씨라고 한다. 한두 달 일하다 도망치듯 퇴사하는 신입사원이 워낙 많아서 이젠 얼굴 익히기도 어렵다. A씨는 자기 전임자가 지난주 월요일 오전 면접, 오후 출근 후 다음 날 퇴사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오후 3시, 잠깐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A씨에게 궁금한 건 없냐고 하자 그가 묻는다.

"과장님 혹시 우리 회사 복지 혜택이 어떻게 됩니까?" "저기 탕비실 보이죠? 냉장고랑 전자레인지 있고, 싱크대에서 온수 나오고요. 여자 화장실도 따로 있어요. 숨 쉬는 공기 말고는 다 복지죠 뭐 ㅎㅎ."

늪84가 동료 직원들과 탕비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유튜브 '늪84' 캡처

A씨가 미간을 찌푸린다. 지난해 나를 포함해 연차를 다 쓴 사람이 회사에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차피 휴가를 쓴들 회사에선 아랑곳하지 않고 수시로 연락한다. 모두가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차라리 출근해서 돈 받고 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늦퇴'에도 불호령, 하루 만에 신입 탈출

직장인 유튜버 '여프리'가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 유튜브 '여프리' 캡처

오후 8시가 다 돼가지만, 직원들은 하릴없이 앉아있다. 이 부장이 퇴근하기 전까지 아무도 일어날 수 없어서다. 걸핏하면 "군기가 빠졌다"며 아래 직원에게 사무실 집기를 집어 던지곤 하는 '꼰대' 부장이 있는 한 '칼퇴근'은 남 일이다. 사장은 칼퇴 후 저녁 약속 간 지 오래다.

눈치 보던 A씨가 슬그머니 가방을 싸기 시작한다. 즉시 이 부장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나 때는 신입사원이 자정까지 일하기도 했다"며 잔소리를 쏟아낸다. 눈치 빠른 정 대리는 진작 정리가 끝난 엑셀 표를 띄우고 괜히 키보드만 만지작거린다.

사무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늪84의 동료 직원. 유튜브 '늪84' 캡처

밤 9시가 넘어서야 이 부장이 퇴근한다. 정 대리는 표정이 굳은 A씨에게 달려가 "회사 생활이 원래 힘들다"며 등을 토닥인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A씨가 사무실을 떠난다. "직원 또 새로 뽑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정 대리는 자기가 잘 설득했으니 괜찮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킨다.

다음날 오전 11시, 점심시간이 다 돼 가는데 A씨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 대리는 지난주 취업포털에 올렸던 모집 공고를 'Ctrl+C, Ctrl+V'해서 재업로드 하는 중이다. 이 부장이 그 뒤에서 한숨을 푹 내쉰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끈기가 없냐?"


당연해진 '웃픈' 현실, 청년들 생각은

지난해 8월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취업예정자가 취업을 희망하는 기업' 조사 결과. 조예진 인턴

물론 모든 중소기업이 정승네트워크와 김 과장네 회사 같진 않습니다. 직원들을 위해 좋은 근무 환경을 마련해주고자 노력하는 곳도 많죠.

하지만 코로나19로 취업 절벽에 내몰린 청년들은 여전히 중소기업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중소기업중앙회 발표에 따르면 여러 형태의 사업장 중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싶다고 답한 청년 구직자는 3명 중 1명(33.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소기업은 '노동 강도에 비해 급여가 낮다'(39.6%)거나 '고용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25.1%)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죠.

밀실팀이 만난 중소기업 직장인들은 '청년들이 안정적으로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대통령 집무실 '일자리 상황판'에 취업률만 담으면 될까요. 그보다 중요한 일자리의 질을 따지는 게 급선무라는 겁니다.

지난 17일 밀실팀과 인터뷰하고 있는 유튜버 늪84. 조예진 인턴

11년 차 직장인 늪84는 "중소기업의 수익 구조가 취약해 근무 환경도 불안정하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야 이런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6년 차 직장인 여프리는 "기성세대의 소위 '까라면 까라식' 군대 문화가 문제"라며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처럼 다른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을 중소기업도 의무화했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연해져 버린 중소기업의 '웃픈'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들. 그저 웃고 넘기거나 대기업 갈 '노오력'을 지적하기보단 이제 정말로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박건·백희연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이진영·조예진 인턴, 백경민

「 밀실은 '중앙일보 밀레니얼 실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밀도있는 밀착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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