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중칼럼] 소문(rumor) (2)

영남취재본부 주철인 2021. 2. 26.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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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나라 교회에 관한 소문은 다양했다. 예배당 건물로, 교인 수로, 새벽기도회로, 선교하는 모범교회로, 엘리트 교인이 많기로, 지역사회를 돌보는 교회로 소문이 난 교회들이다. 그런데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생활로는 어느 교회가 귀감이 되었는가? 예수님이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에클레시아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이것이 목회를 시작하면서 나 스스로 한 질문이었다. 나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이 있다. 예배당 건물은 초라해도, 교인 수는 적어도, 교인들의 수준은 낮아도, 예산은 적을지라도, 세 사람이 모이든 백 사람이 모이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지향하는 목회를 서원했다. 구체적 개념으로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가 귀한 것을 알고 성도들에게 그것을 반복 교육 했다. 즉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축복과 아멘이었다.

교회는 평행감축으로 부흥했다. 초라했던 예배당이 화려한 건물로 바뀌었고 교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해외선교에 앞장섰고, 국내외 20여 교회를 개척설립 하였으며, 국내 농어촌 미자립 수백 교회를 후원했다. 국가정책에 협력하여 복지재단을 설립, 모범적으로 경영하며 작은 자를 돌아보는 교회 본래 사명 실천의 일환으로 매월 100여 가정을 후원했다. 소년소녀가장들을 품고, 장애인복지에 앞장을 서며 그야말로 가히 몸부림치듯 하나님이 기뻐하실 교회의 모습을 구현하였다. 지방교회지만 모든 것을 갖추어 소위 대형교회가 되었어도 교회는 평행감축을 노래하고 이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는 교회로 그야말로 지상 천국이었다.

서임중 목사(포항중앙교회 원로 겸 감림산기도원 명예원장)

그런데 30년 목회를 마치고 은퇴 후 사단의 키질에 놀아난 몇몇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못된 소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사실과 반대되는 밑도 끝도 없는 인신공격으로써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불순한 의도로 유포시키는 선동적인 허위선전을 뜻하는 데마고기(demagogy)였다.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부언낭설(浮言浪說), 부언유설(浮言流說)의 유언비어(流言蜚語)였다. ‘셰익스피어’가 갈파한 것처럼 ‘추측과 질투와 억측을 섞어서 피우는 파이프’가 되어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어 놓고 사랑을 증오로 변질되게 하며 결국 교회를 황량한 벌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럴 때 교회들과 동역자들 그리고 이웃들이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문에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보며 원망과 불평과 정죄의 유혹이 밀려드는 것을 힘을 다해 물리치면서 엎드림의 시간이 깊어졌다.

아름다웠던 목양(牧養)의 역사는 걸레처럼 되어갔고, 교회는 황량한 벌판처럼 되어가면서 교인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시대처럼 되는 것을 보았다. 牧會를 ?會로 만들어 버리는 사단의 전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목도했다. 그제서야 다시금 요한복음 13:2절이 깊이 묵상 되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마귀가 그렇게 하게 한 것처럼 교회를 벌판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나는 그들을 단 한 번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기도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벧전5:8)”는 말씀을 간과하고 현실에 도취되어 근신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깨어있지 아니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제 나는 은퇴 목사로서 목회지가 없다. 그러기에 나는 지난날 모래 위에 세운 집을 묵상하면서 날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오직 성경 한 권만을 품고서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전국을 구역으로 삼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말씀 사역을 한다.

말씀 사역을 하면서 놀라운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아름다운 교회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문이란 웅장한 예배당 건물이 아니었다. 교인 수가 많다거나 예산이 풍족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처럼 세상적인 무슨 굉장한 인물이 많은 것도 물론 아니었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은 오직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주 내용이었다. 곧 믿음의 역사였고, 사랑의 수고였으며 소망의 인내였다. 교회의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役使)였다. 개인적 소욕을 위한 수고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실천하는 사랑의 수고였다.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열심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워가는 소망의 인내였다. 보편적 사랑은 이성에 의한 감정적 격동이지만 성경에서의 사랑은 수고가 수반되는 것을 가르쳤다. 즉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은 매 맞고 못 박히고 죽으시는 수고로 이루어진 결과다. 거두절미하고 참믿음의 사람은 사랑으로 확증되며 그 여정은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를 위한 소망을 잃지 않는 인내의 삶이 된다.

삶, 사람, 사랑은 같은 어원에서 출발했다. 즉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삶이 사람이고 사람이 사랑이고 사랑이 삶이라는 뜻이다. 반려견을 사랑하는 사람이 반려견 머리를 붙잡고 우유를 먹이려고 할 때 개는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우유를 먹으려 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컵을 떨어뜨리고 우유가 쏟아졌는데 개는 그 우유를 핥아먹기 시작했다. 개가 우유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우유를 먹이는 방법이 틀렸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사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는 좋은 교회다. 문제는 교회를 사랑하는 방법이 틀려서 교회가 시끄럽다. 거기서 좋은 교회가 못된 소문이 나게 된다. 그래도 세상에는 좋은 교회가 더 많다. 그런 교회를 보면서 나는 오늘은 이 산골, 내일은 저 어촌을 아내와 함께 운전하면서 그 아름다운 좋은 교회, 좋은 소문을 전하면서 사역한다.

영남취재본부 주철인 기자 lx9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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