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라는 다정한 세계ㅣ사적대화
어렸을 때 배를 깔고 누워 위인전을 읽으며 막연한 꿈을 꾸기도 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면서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면 좋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꼼짝없이 갇힌 요즘, 자신의 삶을 오롯이 가꾸고 세상을 선한 영향력으로 가득 채우는 이들의 이야기가 간절해졌다. 기댈 곳 없는 밤, 〈사적대화〉의 6명의 멘토들이 당신의 마음을 슬쩍 다독이길 바라며 첫 번째 멘토 박세리를 소개한다.
박세리와 함께하는 날이 정해졌을 때, 그 어떤 스타를 만난다고 해도 꿈쩍하지 않던 아빠의 눈에 화색이 돌았다. IMF를 온몸으로 겪고 실패와 좌절의 시기를 견뎌온 나의 아빠는 박세리가 써낸 성공이 유일한 위안이었노라 고백했다. 2021년 지금, 이 순간에도 박세리가 박세리답게 사는 일은 세대의 경계를 무너뜨린 채 우리 모두를 위로한다. 박세리는 오늘도 큰 소리로 웃으며 다정하고 커다란 세계를 구축하는 중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듯 시작된 대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커다랗고 따뜻한 박세리의 꿈에 닿았다.
Q : 〈노는언니〉 반응이 뜨거워요
A : 예상하지 못했어요. 처음엔 단순히 예능 프로그램 고정 출연으로 제안이 왔고 정중히 거절했거든요. 본업도 따로 있고, 제가 전문 방송인은 아니라서 부담스러웠어요. 그렇게 몇 차례 이야기가 오가다가 ‘운동선수들, 특히 여성 운동선수들을 주축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어떨까’라는 새로운 제안을 받았어요. ‘이거다. 더 많은 선수가 방송에 나올 수 있는 취지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출연을 결심했죠. 소수의 선수에게만 관심이 쏠리고 주목받지 못하는 선수들을 보는 게 늘 안타까웠어요. 다양한 선수들을 소개하고 각 운동 종목의 매력을 어필할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요.
Q : 여성 선수들이 이렇게 많이 나온 프로그램은 이례적이에요
A : 위험 부담이 있는 기획이었죠. 톱 연예인들만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반드시 잘될 거라고 보장할 수 없잖아요. 〈노는언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비연예인이고, 또 방송 출연 경험이 거의 없는 운동선수였어요. 그런데 그 자체가 너무 신선한 콘텐츠가 돼버린 거예요. 촬영 컨셉트가 수학여행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아요. 선수끼리 웃고 떠들고, 자기 전에 이런 거 저런 거 하고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거예요. 가끔 이야기에 도취돼 카메라를 등지고 우리끼리 얘기할 때도 있어요(웃음).
Q : 순간 카메라를 잊어버리는 건가요
A : 그냥 우리끼리 할 거 하는 느낌이에요. 카메라 앞이지만 서로 할 말은 하고, 하고 싶은 거 하고 그런 성격인 거죠(웃음). 꼭 예뻐 보이려 하지도 않고, 가진 장점을 나열하지도 않아요. ‘허당’인 모습도 숨길 수가 없어요. 다들 자기 종목에서 한 자리씩 했던 선수들인데도 말이죠.
Q : 대단한 선수들의 엉뚱한 면모를 많이 볼 수 있었어요
A : 솔직히 운동선수들은 뭐든지 할 때 기본 이상이겠다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끈기와 재능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자기 종목 빼고는 다 못해요. 너무 신기해요. 이런 게 우리도 재미있지만,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요.
Q : 그렇지만 게임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경쟁이 벌어지던 걸요
A : 순간에 몰입하는 거죠. 운동선수들의 승부욕은 어쩔 수 없어요. 다른 건 한 개도 안 보여요. 딱 그것만 해야 해요. 서로 다른 종목일지라도 운동선수끼리는 공통점이 많아요. 특히 현역 선수들은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시원하게 할 곳이 없어요. 경쟁하다 보면 해야 할 말보다 안 해야 할 말이 더 많거든요. 그렇지만 일단 우리는 경쟁 상대가 아니고, 유대감이 형성되니까 자연스럽게 속 얘기들을 하게 되죠. 처음 보는 사이지만 순식간에 친해지더라고요.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부상 이야기로 시작해서 부상 이야기로 끝나죠. 선수들은 항상 스스로 최면을 걸어요. ‘이것만 지나가면 된다.’ ‘지금 너무 아프지만, 한 번만 더 해보자.’ ‘마지막까지 해보자’.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훈련을 시작하니까 치료 기간이 일주일이면 될 게 한 달이 되고, 한 달이면 될 게 1년이 되고, 10년이 돼요. 결국 은퇴한 선수들의 몸은 만신창이예요. 온몸에 수술 자국이 한두 군데 있는 게 아니에요. 일상생활은 할 수 있겠지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범위가 작아져요. 그걸 본인만 아는 거죠. 주변 사람들은 잘 몰라요.
Q : 그럴 때 어떤 얘기들을 해주나요
A : 모든 걸 내려놓고 컨디션이 100%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요. 물론 쉽지 않아요. 컨디션이 100%가 아닐 때 복귀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요. 그게 더 큰 부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치료받으면서 ‘이제 완전히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 그건 그냥 마음인 거예요. 하루빨리 복귀하고 싶은 마음.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마음.
Q : 이런 대화들이 꼭 필요하겠네요
A : 선수끼리 모여서 얘기하다 보면 진심이 드러나요. 얼굴과 목소리에 감정이 뒤섞여 있는 거죠. 지금의 자리까지 오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 아픔들이 고스란히 느껴져요. 방송을 통해 선수들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항상 감사한 마음이에요. 운동선수들을 향한 시선이 달라진 게 느껴지거든요. 이 모든 게 후배들이 자신을 돌보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거라 믿어요.
Q :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거군요
A : 요즘 여러 곳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솔직히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어요. ‘운동선수가 운동으로 성공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런데 한두 번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 모두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는 걸 알게 됐죠. 전문성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길을 잃을 때도 있지만, 기필코 일어나요. 저는 단지 운동선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처음부터 성공한 사람은 없어요. 타고나기만 한 사람도 없고요.
Q : 박세리는 타고난 편 아닌가요(웃음)
A : 저는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만약 최고라고 생각했다면, 딱 거기까지였을 거예요. 한번 정상에 올라본 사람. 그렇지만 저는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니까. 스스로에 믿음을 갖고, 기대감을 갖고, 새로운 것에 계속 도전해요.
Q : 〈쓰리박: 두 번째 심장〉에서 새로운 꿈에 도전한다고요
A : ‘골프 선수가 아니었으면 어떤 걸 했을까’라는 주제로 시작했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사업가라고 답했겠지만, 경영은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잖아요. 저는 먹는 걸 좋아하니까 음식을 중심에 두고 생각했죠. 누구나 다 나름의 고민이 있잖아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초대한 후 요리를 대접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제가 요리를 더 배워야겠지만요. 여러모로 구상 중이에요.
Q : 감독 박세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A : 다른 스포츠는 선수와 코치가 경기 도중에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골프는 그게 불가능해요. 선수들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혼자가 되죠. 처음 감독을 맡으면서 제 역할을 선수들이 대회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매니저처럼 생각했어요. 식사나 숙소 등을 꼼꼼히 살폈고요. 모두가 조금이라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고맙게도 너무 잘해줬어요.
Q : 2016년 리우올림픽이었죠. 그날 눈물을 보였어요
A : 금메달을 딴 박인비 선수만 울지 않았어요. 이를 지켜본 모든 선수가 울었죠. 만감이 교차했던 것 같아요. 감사함도 있었고, 후련함도 있었고요. 박인비 선수가 부상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거든요. 성적이 잘 나오면 좋겠지만, 안 나오면 마음이 달라질 테니까 부담이 컸을 거예요. 출전 전날 선수들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처음이니까 성적을 잘 내야겠다고 부담감을 느끼기보다 최선을 다하자. 다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앞으로 또 누가 올림픽에 나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결과가 어떠하든 우리의 경험이 후배들한테 도움이 될 거다”라고요.
Q : 지금 스포츠 교육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10년 뒤 박세리가 생각하는 큰 그림은 뭔가요
A :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프로그램과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만약 한국 골프가 박세리에서 끝났다면 그 이야기는 역사책에나 남아 있을 거예요. 한국 골프를 세계 정상으로 이끌고 있는 건 모두 후배들이죠.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하는 게 제 바람이에요. 골프뿐 아니라 모든 종목의 선 수들이 좋은 환경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Q : 세계 평화 같은 엄청난 꿈인데요(웃음)
A : 쉽지 않지만 분명 가능하다고 믿어요. 안 되는 건 없죠. 물론 혼자 해내기에는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그래도 제가 조금이나마 문을 열어둔다면 막연하게 꿈꾸는 것들이 결국 눈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요. 대한민국 스포츠가 세계 최고였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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