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인간의 사랑과 정신, 우리는 답을 알고 있을까

2021. 2. 25. 19:3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중력, 사라 스트리츠베리 지음, 박현주 옮김, 문학동네, 452쪽, 1만5500원.
‘사랑의 중력’은 북유럽 최대 정신병원 베콤베리아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한다.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마주한 인간을 따뜻하게 보듬는 작가의 시선도 확인할 수 있는 소설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문어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알아야 할 이유와 사연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어쩌다가, 뜻밖에, 당장의 쓸모가 없이 알게 되는 정보들은 얼마나 즐거운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에 이어 박혜진 평론가의 추천으로 ‘아더 마인즈’까지 내처 읽었다.

다큐멘터리가 예습이었다면 ‘아더 마인즈’는 선행 학습의 상대적 얄팍함을 도드라지게 하는 본격적 수업이자 자발적 복습이었다. 생물철학 및 정신 철학 전공인 저자 피터 고프리스미스는 “단서를 찾아 몸을 움직여” 진화의 끄트머리에 있는 두족류의 신비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신비함 중의 하나가 문어가 보여주는 감각의 초월적 발달이다. 두족류의 커다란 신경계는 무한한 가능성의 신체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문어는 몸에 뼈가 아닌 뉴런을 채웠고, 단단한 껍데기 대신 예민한 신경계를 몸의 외피에 두르는 걸 택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에서 문어는 정신의 진화까지 이루었으며, 지구상에서 꽤나 영리한 생명체가 되었으나, 대신 수명은 2년 안팎으로 단축되었다. 문어는 그렇게 생애의 전체를 최대한으로 감각하고 최소한으로 영위하는 것이다.

“정신의 진화”라는 데 여러 번 밑줄을 그었다. 우리는 정신에 있어 인간의 영역을 너무 과대하게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평안, 괴로움과 외로움 모두가 인간에게만 부여된 진화의 선물일까? 혹은 인간보다 조금 덜 섬세하게 진화된 정신이라고 하여 그 정신이 느끼는 감각과 감정을 모르는 체 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펄펄 끓는 탕에 살아 있는 두족류(낙지)를 집어넣고, 좁고 얕은 인공 호수에 어류(산천어나 연어)를 몰아넣고 그걸 재미로 잡아 죽이는 축제를 기획하고, 심지어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 모두 정신이 진화가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인간이 저지르는 짓이다.


그런 인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문어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보다는 다소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사라 스트리츠베리 장편소설 ‘사랑의 중력’이 그러한 괴로움이 괴로움만으로 끝나지 않게 도와주었다. 소설은 1932년 문을 열어 1995년 문을 닫는 초대형이자 격리형 병원 ‘베콤베리아’를 주된 배경으로 한다.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 우울과 함께 사람이 치료를 위해 그곳에 수용되었다. 다시 말해,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치료한 셈이다.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고, 환자에게 최적이라고 판단되는 환경을 제공하지만, 사회로부터 그들을 분리하고 배제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 화자이자 주인공인 ‘야키’의 아버지 ‘짐’이 수용되어 있다.

야키는 베콤베리아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아버지 곁을 맴돈다. 베콤베리아의 환자는 아니지만, 그곳의 일원인 듯 그곳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결국 아버지라는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키는 아버지 곁을 먼저 떠나지 않는다. 떠나는 건 놀랍게도 아버지였다. 훗날 불쑥 다시 연락을 해온 아버지는 다시 자신의 죽음을 말한다. 야키는 이번에도 아버지 곁에 있으려고 한다. 야키가 이해하려고 하는 건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할머니도 아니다. 야키는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서 자신을 알고 싶은 것이다. 우울과 자살이라는 정신적 충동이 자신의 삶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것인지, 자신의 아들에게도 마찬가지일지, 인간의 의지로 헤어나갈 수 있는, 바꿀 수 있는 운명이란 게 있을 것인지. 야키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내내 묻고, 또 묻지만 소설의 모두가, 세상이 내놓은 (베콤베리아를 포함하여) 그 답변의 행렬에 속하길 머뭇거린다. 주저하고 유보한다. 가령 아래의 장면처럼.

“나를 사랑하기는 했어요?”

“모르겠어, 야키. 내가 사랑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어.”

인간의 정신에 대해, 정말 잘 모르겠다. 인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문어는 답을 알고 있을까? 문어뿐 아닌 모든 생명체가 지금의 인간보다는 현명할지도 모를 일이다.

서효인 시인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