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믿음과 사랑의 시험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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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라는 말을 구분 없이 사용하다 보니 불필요하게 소모적 논란에 빠질 때가 있다.
예배의 역사와 개념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것만큼은 구분하는 게 유익할 것 같다.
교인들이 '예배 중단' 또는 '예배 인원수 제한'이라는 말에 격하게 반응하는 건 두 가지 생각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뜻의 '주일성수'와 관련된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의 예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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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라는 말을 구분 없이 사용하다 보니 불필요하게 소모적 논란에 빠질 때가 있다. 예배의 역사와 개념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것만큼은 구분하는 게 유익할 것 같다.
교인들이 ‘예배 중단’ 또는 ‘예배 인원수 제한’이라는 말에 격하게 반응하는 건 두 가지 생각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뜻의 ‘주일성수’와 관련된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의 예배’다.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분들은 안식일 계명과 연결된 회중 모임 방식의 예배를 염두에 두고 있고, 다른 쪽은 로마서 12장 1절과 연결해 ‘산 제사’ ‘영적 예배’ 즉 ‘일상의 예배’를 머리에 담고 있다. 통상 이 둘을 ‘예배’라는 말로 퉁쳐버리지만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차원이다.
집회 방식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의식의 형태로 전달하고 표현하는 제식’이다. 이에 비해 바울이 언급하는 ‘영적 예배’는 신앙이 녹진하게 묻어난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뜻한다. 제식으로서 종교의식과 신앙적 일상은 형식적으로 엄연히 구분된다.
종교의 제례의식과 관련된 리츄얼(Ritual)의 어원은 고대 로마로 소급된다. 독일어 리히티히(richtig·옳은, 정확한), 영어 라이트(right)의 어원이기도 한 리츄얼은 ‘정확한 수량’을 뜻하는 것이었다가 후에 예절이나 습관에도 적용됐다. 형용사로만 쓰이던 이 단어는 차츰 바른 예절과 관습을 교육하는 공공기관에서도 사용하게 되는데 거기서 비로소 ‘예식’ ‘제례’ ‘종교의식’을 뜻하는 명사로 자리 잡게 된다. 그 단어가 바로 제의 제식을 뜻하는 리투스(Ritus·영어 rite)다. 이 용어는 기독교에서도 예배의식 절차와 순서를 지칭하는 전문용어로 자리 잡는다. 교회당에서 진행되는 주일예배도 일종의 종교 제식(Ritus, rite)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 제의로서 ‘주일예배’는 불필요한가. 이건 좀 다른 문제다. 제의라는 것은 단순히 종교의 범주를 넘어서는 사회과학적 주제인데 사회학적으로 봤을 때 사회의 복잡성을 해소하는 핵심요소가 바로 종교와 종교제의임은 상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 건 종교(성)를 벗어날 길이 없다. 무교의 형태라 해도 그것에 신뢰의 토대를 두고 있는 한, 일종의 종교(성)로 기능한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 ‘종교가 필요 없다’는 생각은 낭만주의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회의 복잡성을 해소하는 기능의 종교는 개인적·신비적 범주에 안주하지 않는다. 사회적 기능을 가진 종교는 공동체적 특성을 지향한다. 그 공동체성은 회집 형태의 제의로서 출발한다. 출발점 없이 공동체성도, 신앙의 일상화도 실현되기 어렵다. 특별히 기독교의 종교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이웃에게 확장되는 특성을 가진다. 쉽게 말해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교회 담장을 넘어야 한다. 이를 우리는 ‘이웃사랑’이라 표현하는데 이 원칙을 고수하며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다.
교회 스스로 얼마나 담장 밖에 신뢰를 주고 있는지 깊이 돌아봐야 한다. 대면예배에 대한 외부 제한이 더 심해지건, 자발적으로 주일예배를 휴회하건, 그 기간이 짧건 길건 간에 참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주일성수를 놓지 못하는 이유를 헌금이나 교회운영 때문이라고 매도하는 세태가 매우 불편하다. 기독교인들이 주일성수를 놓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는 우리 모두가 불안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예배의 위기’라는 이 시절이 교회의 ‘믿음과 이웃사랑을 시험하는 진정한 무대’(루터)임을 기억하자.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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