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부산 피난살이, 뒷돈 요구한 보훈 신청
[김삼웅 기자]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해방은 미국과 소련 두 전승국가에 의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운명이 되었다.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새로운 상전 노릇을 하였다. 누구보다도 분통한 것은 독립운동가들이고, 일제 패망을 보지 못한 채 숨진 순국지사들은 지하에서 통분하였을 것이다. 독립운동 가족(유족)들의 심경도 다르지 않았다.
평양에서 해방은 맞은 최운산 장군의 아들 최봉우는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로 취직했다. 유려한 말솜씨와 폭넓은 학식으로 취업이 가능했다. 당시 북쪽은 김일성 우상화 작업에 모든 매체가 동원되었다. 그도 '봉오동의 혈통'이 아니었으면 여기에 적응하고 기득권층에 편입되었을 터이다. 고향에 있을 때 결혼했던 아내가 찾아오고,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던 중 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가 먼 길을 달려왔다.
1950년 6ㆍ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최봉우의 가족 네 식구가 남한으로 내려 온 것은 어머니의 결단이었다. 두 살 된 손자를 업고 전란 중에 평양에서 2천리 길을 걸어 부산까지 피난하였다. 봉오동의 여걸이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 결단이고 결행이었다. 이것이 봉오동에 남은 어린 자식들과 영영 이별이 될 지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들 가족의 부산 피난생활은 새삼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일가붙이는 물론 만주에서 내려온 피난민이다보니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독립군의 가족, 그것도 봉오동대첩의 주역 최운산 장군의 유족이라는 자부심이 가족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봉오동에 남긴 자식들과는 서신은 커녕 생사도 알 수 없었다.
▲ 좌측부터 여운형, 최운산, 신원미상 |
ⓒ 반병률 |
최운산 장군 유족 특히 부인 김성녀 여사의 바람은 남편과 형제들의 서훈과 봉오동 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이승만 정권의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등을 지낸 이범석이 북만주지역 무장독립 운동의 모든 공을 자신이 속한 김좌진 장군의 업적으로 돌려놓았고 독립운동연구자들은 이를 검증없이 그대로 기술하였다. 김성녀와 아들 최봉우는 정부에 최 장군의 서훈을 신청하였다.
1961년, 최운산 장군의 업적이 서훈심사위원회를 통과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총무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당시 보훈 업무를 담당하던 총무처의 직원이 서훈을 조건으로 뒷돈을 요구했고, 격분한 아버지는 그에게 주먹을 날리셨다. 그 사건 뒤 최운산 장군의 서훈이 취소되었다. 몇 번의 재신청도 계속 거부당했고 세월이 흘렀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던 김성녀 여사는 1969년 요로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주석 1)
▲ 최운산·최진동 형제 |
ⓒ 최성주 |
김성녀 여사는 자신이 겪었고 지켜보았던 봉오동 전쟁의 실상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관계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뒷돈'이 없어서였는지 정부의 서훈 소식은 없었다. 가짜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고, 뇌물을 줘야 서훈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범석이 정계에서 활약하던 1960년대 말 김성녀는 그를 찾아갔다. 중국인 부인과는 봉오동 자신의 집 사랑채에서 한동안 함께 살았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세 차례나 방문했지만 이범석을 만날 수 없었다.
이범석의 역사왜곡으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에 대한 기술이다.
국민회에서는 홍범도(洪範圖)와 안무(安武), 의군부에서는 최진동(崔振東)ㆍ명록(命錄) 등등이 군대를 데리고 8일 밤 도착했다. 4백여 병력이 온 국민회 군대가 가장 많았고, 의군부에서는 약 2백 명, 한민단은 약 1개 중대병력이, 본래 군대가 2백도 채 못되는 의민단에서는 일부 모험대원만 보내왔다.
8일 밤 작전회의를 열고 김좌진 장군을 총지휘로, 홍범도, 최명록 두 분을 부사령관으로, 여행단장이었던 내가 전적 총지휘, 즉 전투사령관으로 부서를 정했다. 또한 홍범도부대가 터시고우방면, 의군부가 무산간도(茂山ㆍ間島) 방면의 버들고개(柳嶺), 군정서군대는 중앙의 송림평(松林坪)을 각각 작전지역으로 정했다.
그런데 9일날 새벽에 보니 아무 연락도 없이 모두들 떠나가 버렸고, 다만 한민단 1개중대만 남아있었다. 3개 단체는 아무 말 남기지도 않고 밤의 장막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서와 임무배당에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불만도 있었겠지만 5만이 넘는 적의 대병력의 기세에 압도당해 전의를 상실한 게 확실하다. (주석 2)
주석
1> 최성주, 앞의 책, 103쪽.
2> 이범석, 『우둥불』, 89쪽, 사상사, 1971.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최대집 의협'이 툭하면 코로나 볼모 잡는 세가지 이유
- 인사규정 바꾼 금감원, '채용비리' 팀장이 부국장 승진
- 밀가루 시킨 뒤 본 그 뉴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 '퀴어 축제' 피하는 서울 시장? 진짜 문제는 이거다
- 똥 기저귀를 가는 '미천한 순간'이 일깨워주는 것
- "이젠 피임약 광고도 할 수 있다" 더 당당해진 박하선의 고백
- 충주호의 아름다운 야경에 감춰진, 1500년의 슬픔
- 집값 폭등한 서울과 세종, 출산율 감소 폭도 컸다
- 정의당 "문 대통령 차별 발언 꺼내든 안철수, 도긴개긴"
- 갑자기 돌아온 아버지...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