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북한산] 화강암, 그 꽃돌을 사뿐히 즈려밟고

이지형 헬스조선 취재본부장 2021. 2. 2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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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다. 수억 년 전 뜨겁던 마그마의 기억을 품고 있다. /사진=이지형 헬스조선 취재본부장

천마산엘 갔다. 경춘선 타고 창밖 내다보는 잠깐 사이 갈매·별내 스치고 퇴계원 지나더니 금방 천마산역이다. 해발 810m 정상의 운해(雲海)를 얘기한 지인이 있었다. 이른 아침, 봉우리를 감싸는 구름바다가 장관이라 했다. 그러나 짙고 습한 안개가 초심자의 산행을 두텁게 막아섰다. 구름바다에 대한 기대를 살짝 버렸다. 그런데 운이 좋았나. 덕을 쌓았나. 절경은, 발아래로 펼쳐지고 만다.

그럼에도 아쉬웠다. 천마산 정상에서도 북한산을 볼 수 있다 했는데 안개 탓에 먼 풍경은 사라졌다. 급경사의 단조로운 흙길은 지루했다. 암반으로 이뤄진 북한산의 수려한 능선과 발밑으로 전해지던 짜릿함이 생각났다. 그래서 천마산에겐 많이 미안하지만 다시 북한산 이야기, 화강암 이야기.

◇중생대 쥐라기로 거슬러 오르는 북한산의 역사

도발하듯 하늘로 솟은 세 봉우리, 백운, 인수, 만경을 보며 사람들은 삼각산이란 이름을 건넸다. 회색빛 또는 우윳빛의 거대한 세 암괴(巖塊)는 신비롭기 한량없다. 흙이 쌓여 만들어지진 않았을 테니 언젠가 솟아났을 텐데, 언제일까.

수억 년 전, 아직 고생대였을까, 이미 중생대였을까. 한반도 아래로는 황금빛의 마그마가 흐르고 또 흘렀다. 비상(飛翔)을 준비하며 잠복한 용처럼 한반도 밑 지하 10㎞ 부근을 유영하던 마그마는 어느 순간, 서서히 굳기 시작한다. 그리고 1억7000만 년 전 쯤 단단한 바위가 되고 만다. 중생대의 쥐라기 시절, 공룡들이 한창 지상을 휩쓸고 다니던 때다. 거대한 바위층이 지하 세계를 석권했다.

비상의 꿈을 접고 돌이 된 용은 긴 잠에 빠졌다. 지상을 넘보지 않았다. 그러나 1억년 단위의 시간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불가능은 길어야 100년을 기본 단위로 삼는 인간 세상의 일이다. 38억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가 그랬듯, 시간은 기적의 거처, 그것도 유일한 거처다. 그래서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가 하면….

◇신화처럼, 전설처럼… 거대한 화강암이 솟아올랐다

10㎞ 두께의 ‘지상’이 비바람에 깎이고 사라지더니 고이 잠들어 있던 석룡(石龍)이 깨어났다. 지상으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산의 출현이다. 신화처럼, 전설처럼, 거대한 바위 능선은 나중에 서울이라 불릴 한강 이북의 평지를 크고 넓게 감쌌다.

그렇게 한때 마그마였다가 시간과 땅을 뚫고 지상으로 솟아난 바위를 화강암(花崗巖)이라 부른다. 꽃 화(花)에 봉우리 강(崗). 석영과 장석, 운모가 뒤섞여 희읍스름하다. 연하기도 탁하기도 한 바탕 위로, 까맣고 투명하고 때론 붉은 점들이, 흩날리다 만 눈송이처럼 박혀 있다. 화강암의 우리말인 ‘쑥돌’의 연원을 알 만하다.

그러나 화강암은 차라리 꽃돌이다. 바위 속으로 흩어진 점들은 쑥의 알갱이보다 꽃의 파편에 가깝다. 어느 봄날, 흩날리던 꽃잎들이 바위 속으로 틈입했나. 화강암은 제 속으로 무수한 꽃잎들을 품는다. 북한산은 거대한 꽃돌들이 자신의 견고한 몸체를 널찍하게, 굽이굽이, 아주 멀리까지 펼쳐놓은 공간이다. 북한산을 거닌다는 것, 그건 도처에 꽃으로 피어난 바위들과 쉼 없이 부딪치는 일이다.

◇수억 년 전 마그마의 기억 품은 북한산의 능선들

주말이면 수많은 인파가 백운대로 몰린다. 계절도 가리지 않는다. 산 중턱에 자리한 도선사까지 택시나 승용차, 관광버스를 타고 오르면 고작 한두 시간 산행만으로도 백운대 정상에 선다. 하루재에서 숨을 고르고, 위문(백운봉 암문)에서 마음을 다잡고 나면, 백운대 836m 고지로 향하는 화강암 군집이 눈앞에서 수직으로 상승한다.

온 몸으로 가파른 백운대와 부딪치면서, 사람들은 한두 번 쯤 정신을 잃는다. 거대 암벽에 압도되고, 강력한 지기(地氣)에 감전되고, 때때로 나타나는 운해, 그 구름바다에 탄식한다. 미(美)가 사라진 자리에 숭고(崇高)가 들어선다.

미와 숭고의 저변에 수억 년 전 마그마의 기억이 깔려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처럼, 땅속을 분분히 헤집고 다니던 용틀임의 기억. 백운, 인수, 만경을 이룬 화강암 속에는 그렇게 불덩이 같은 욕망과 비상의 꿈이 꽃잎처럼 녹아 있다. 풍수(風水)를 들먹이지 않아도, 북한산은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다. 중생대 쥐라기에 화석화된, 그러나 1억7000만 년이 흐른 뒤 역동적인 화강암의 능선으로 부활한 용이다.

북한산을 거닐면서, 우리는 용을 만나고 꽃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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