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선 칼럼] 녹음하는 공직사회

데스크 2021. 2. 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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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정부 적폐청산 1심 판결 95건 중 무죄판결율 15.8%
문 정부 들어 공직자들 직권남용 혐의 고발 건수 급증
다음 정권에서 문제 될 경우 대비 비망록 만들라 충고
공무원 적극행정 독려로 되는 게 아니며 일할 환경 필요
ⓒ데일리안 DB

김명수 대법원장이 거짓말 논란에 휩싸여 곤혹을 치루고 있다. 한 고위 법관이 제출한 사표를 탄핵 사유를 근거로 반려했다는 의혹을 부인하다가 해당 판사가 대화 녹음 파일을 공개하면서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녹음파일이 없었다면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스마트 폰 등 정보기술이 발전되면서 비밀 녹음이나 녹화가 일상화되는 추세다. 이런 현상은 현 정부 출범 이후 공직사회에까지 널리 확산되고 있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 캠프의 국민통합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한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적폐청산 때문에 ‘공무원들이 상관의 지시를 녹음하거나 기록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대선 1호 공약이었던 적폐청산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각 부처마다 위원회 또는 태스크 포스를 만들어 적폐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교육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국정농단 사건이라 규정하고, 교육부 장관은 물론 실무자까지 수사 의뢰한 바 있다. 해양수산부에서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전 장관 등을 수사 의뢰했고, 외교부에서는 전 정권의 한미 방위비 협상과 관련하여 대사를 직위 해제했다. 지시에 따라 성실하게 일했던 많은 공무원들이 마치 부역자 취급을 받았다.


지난 해 한 언론에서 이른 바 적폐청산으로 재판에 회부된 106건 중 1심 판결이 나온 95건에 대해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무죄판결율이 15.8%였다. 2019년 1심 형사사건 무죄율이 3.1%인 것에 비하면 무려 5배를 넘고 있다. 이는 적폐청산 수사가 무리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 정권의 적폐청산 와중에 그 적폐가 무색해 질 중대한 불법행위들이 저질러졌다는 점이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과 월성 1호기 원전의 경제성 평가 계수 조작 의혹, 환경부의 이른 바 ‘블랙리스트’ 사건 등이 검찰수사로 드러났고, 앞으로 또 어떤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다.


현 정부 들어 공직자들이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당한 건수도 늘고 있다. 최근 공개된 현 정부 약 4년간의 직권남용 사건 전체 건수는 5만 3147건에 달한다. 연도별로는 2017년에 9017건, 2018년 1만 3462건, 2019년 1만 6660건, 2020년(1월~11월) 1만 4008건이었다.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6년에 4489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 정권 정책과 관련된 공직자들을 ‘적폐청산’, ‘직권남용 척결’ 프레임으로 옥죈 것인 부메랑 된 결과라 할 것이다.


이런 공직 환경은 공무원들에게 정권교체 후 밀어닥칠지 모를 또 다른 적폐청산에 대비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문제 될 일을 하지 않으며 복지부동하거나, 상사와의 대화를 녹음 또는 비망록으로 작성해 놓는다고 한다. 지난 해 ‘적자 국채발행 외압’ 등을 폭로했던 기재부의 한 사무관은 선배로부터 다음 정권에서 문제가 될 경우에 대비해 비망록을 만들라는 충고를 들었다고 밝혀 충격을 준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면 안된다’며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행정을 주문해 왔다. 정세균 총리는 적극행정을 펼친 부서나 직원들에게 ‘일하다 접시를 깨는 일은 인정할 수 있어도, 일하지 않아 접시에 먼지가 끼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지론이 담긴 ‘적극행정 접시’를 수여한다고 한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적극행정은 독려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최근 재난지원금 지급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행정부처 전문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정치 논리만 횡행하는 모습이다. 민주당에서는 재정건전성을 우려하는 기재부를 ‘반개혁 세력’이니 ‘기재부의 나라냐’라는 식으로 몰아세우며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큰 틀의 정책 방향은 청와대나 집권당에서 결정하지만, 구체적인 실행계획 등은 전문가 집단인 해당 부처에서 충분히 검토한 후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의 정책결정자는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정책결정자가 책임질 것이라는 믿음을 주지 않는 한 공직사회는 더욱 움츠러들 것이 자명하다.


글/이기선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

데일리안 데스크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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