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옥, 비취, 옥란.. 꼭 기억됐으면 하는 그녀들의 이름
인천의 국악 이야기는 다른 문화·역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인천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은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기자말>
글쓴이 : 윤중강 문화재위원(국악평론가)
1934년 12월 7일 새벽 4시,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의 인천 용동은 유흥문화의 중심. 용동권번이 있고, 주변에는 요리집이 많았다. 권번 소속의 기생들은 요리집에서 호출이 오면, 거기서 '놀음'을 벌였다. 노래와 춤으로 요리집은 들썩였다.
한국 최초 수족관에서 펼친 기생들의 공연
용동의 유흥가에 '연흥관'이 있었다. 강도는 연흥관 주인방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주인의 비녀를 빼앗아서 도망쳤다. 그런데 비녀는 순금(純金)이 아니라, 당시 '멕기'라는 말로 통했던 도금(鍍金)이었다. 그래서 기사의 제목이 '강도의 헛수고'(1934년 12월 9일자 <동아일보>)였다.
용동권번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권번(券番)은 일제 때의 기생조합이다. 기생이 되려면 권번에서 노래와 춤을 익혀야 했다. 기생은 권번에 기적(妓籍)을 두고 활동했다. 인천은 최초 개항지(1883)로, 일찍이 유흥문화가 발달했다. 용동권번은 명칭을 달리하기도 했고, 훗날에는 이해관계가 얽혀서 두 개의 권번으로 갈리어 분규가 계속됐다.
용동권번의 옛 이름은 소성권번(邵城券番)이었다. 소성은 인천의 옛 이름이고, 소성권번시절의 기생들은 인천 지역사회를 위해서 여러 좋은 일에 앞장섰다. 1930년대는, 용동권번의 전성시대였다. 그들은 요리집뿐만 아니라, 애관(경동, 당시 외리)와 가부키극장(사동, 당시 빈정)에서 공연을 펼쳤다.
용동권번의 기생들은 거문고에서 사교춤까지, 조선의 고유한 노래인 잡가(雜歌)부터 내지패(內地唄)까지 가능했다. 내지패란 무엇일까? 일본에게 강제 합병당한 조선은 일본을 내지(內地)라고 했고, 패(唄)는 한자권에서 노래를 뜻했다. 이렇게 다양한 것을 할 줄 아는 용동권번기생이었지만, 그 중심은 역시 조선의 고유한 가무였다.
세월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1915년 일제(조선총독부)에 의해 주도돼 전국적으로 펼쳐진 조선물산공진회(1915년 9월 11일~10월 31일)가 유명했다. 서울에선 경복궁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인천에선 사동(빈정)이 중심이 됐다. 거기에 수족관이 만들어졌다.
인천이 최초가 참 많은데, 수족관이 만들어진 것도 최초다. 당시 매일신보에선 인천 수족관 공연을 다루고 있다. 일본인 기생이 출연을 했고, 다양한 공연을 펼쳤다.
주옥, 비취, 옥란, 향란, 금화, 명목, 옥향... 용동권번 소속의 예기(銳騎)의 예명(藝名)이다. 공연의 중심은 조선의 가무였다. 이 시절을 증명해주는 두 장의 사진(엽서)이 전해진다.
▲ 조선물산공진회 포스터 |
ⓒ 자료사진 |
꼭 기억했으면 하는 인천의 공연, 그리고 이름
한일합병으로 관기(官妓)제도가 폐지되면서 그들은 민간에서 활동하게 됐는데, 초기의 기생조합이 권번(券番)으로 명칭이 바뀐 것이다. 초창기 기생조합의 예기는 매우 품격 있는 노래와 춤을 구사했다.
용동권번을 특별히 용동예기권번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필수적으로 '춘앵전'이란 궁중무용을 배웠을 것이다. 춘앵전은 봄날(春), 꾀꼬리(鶯), 지저귐(囀)으로 풀이할 수 있는 시적인 춤이다.
기생들은 사회에서 대접 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사회를 위해서 기여한 예는 많다. 용동권번 소속의 기생의 활약은 대단했다. 당시 신문이 증명한다. 1926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에 '학교 경비위해 예기들이 연주'란 기사가 실렸다. 용동권번 주최, 인천신문기자조합연합 후원한 이 공연은, 영화학교(현 영화초등학교, 1892년에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 사립학교)와 관련이 있다.
▲ 장일타홍은 용동권번 출신으로, 신민요가수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사진은 조선중앙일보 기사. |
ⓒ 국립중앙도서관 |
이는 당시 공연을 뜻하는 흥행(興行)과는 다르다. 흥행이 전형적인 '엔터테인먼트' 라고 한다면, 온습회는 그간 배웠던 것을 복습하면서, 학습에 도움을 준 분들을 모시고 펼쳐지는 공연 성격이 강했다.
또한 온습회는 따뜻하다는 한자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지역사회의 유지들을 모시고 공공기금을 마련하는 자리에도 붙는 이름이다.
[인천] 인천 제二(이)공립 보통학교설치 재원이 부족함에 감하야 인천소성권번 기생까지 출동하게 되엿다. 인천소성권번에서는 인천 제二(이)공립보통학교 설치자금에 충당하기 위하야 금월 十九(십구)일 二十(이십)일 二十一(이십일)일 三(삼)일간 인천 외리(外里) 애관(愛舘)에 가무온습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1932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
1930년대, 인천의 국악공연사에서 제2보통학교 설립 소성권번 온습회(1932년 11월 19일~21일 애관)와 영화학교 돕기 용동권번 자선공연(1933년 11월 27일~ 28일 가부기좌)은, 인천의 문화시민이 기억했으면 하는 공연이다.
인천 용동에 근거지를 두고 근처의 요리집과 인천의 주요공연장에서 큰 활동을 했던 인천의 예기는 아쉽게도 1937년부터 여러 잡음을 일어난다. 1938년에는 용동권번이 '인화권번'과 '인천권번'으로 두 쪽으로 갈리게 되면서, 인화권번에서 인천권번을 상대로 소송을 벌어진다.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용동의 권번은 점차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현재 용동권번의 표지석(돌계단)이 남아 있는 근처에는 칼국숫집이 많이 있다. 그 중 한 칼국수집은 최초의 주인이 '기생할머니'라고 알려졌다.
인천권번의 기생들은 유명했다. 기생들은 지역사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으나, 실제 기생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따뜻하지 않았다. 인천기생들은 한 시대를 그렇게 활동을 하다가, 신분을 감추면서 새로운 삶을 택했다. 기생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기에, 그들은 그 이름을 어느 순간에 버렸다.
▲ 인천시립무용단의 '춘앵전' |
ⓒ 윤중강 |
옛날 찾아 동산을 올라갔노라 / 잔디밭에 봄빛은 푸르렀건만 / 님 사시던 마을엔 인적도 없고 / 지는 볕에 살구꽃 그저 하얄 뿐
저고리는 연분홍 치마는 검정 / 나풀나풀 바람에 나부끼던 양 / 어제런 듯 이 눈에 암암하건만 / 이 날에는 모두가 꿈이란 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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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윤중강 문화재위원(국악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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