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교통사고가 만들어 낸 조각난 진실
[장혜령 기자]
▲ 영화 <빛과 철> 포스터 |
ⓒ 찬란 |
제목과 포스터를 봐서는 그 내용을 짐작하기 힘든 의뭉스러운 영화를 만났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세 여성의 표정은 원망, 두려움, 결연 등이 교차한다. 대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이 깊어진다. 영화 <빛과 철>은 한밤중 벌어진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가는 운전자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이미 벌어진 하나의 교통사고. 그 후 현장에 있지 않았던 세 사람의 조각난 진실이 삐걱댄다.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진실 사이에서 미스터리는 배가 된다. 과연 이미 벌어진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지, 누구의 말과 기억이 맞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결과를 통해 답을 찾아가려는 과정이 애초에 잘못된 건 아닌지 의구심마저 든다. 거짓과 진실, 정답을 찾기보다, 답에 접근하는 여러 시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영화다.
▲ 영화 <빛과 철> 스틸 |
ⓒ 찬란 |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그날 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고 현장에 없었기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이성적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황망한 감정과 죄책감. 경찰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남편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 오던 차량에 부딪혔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어렵사리 희주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공장일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만나서는 안 될 사람과 마주하며 다잡은 평정심에 거친 파도가 일렁인다.
상대편 운전자의 아내 영남(엄혜란)은 식물인간이 된 남편의 간병과 생계유지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남편이 다니던 공장의 급식소 일로 생활비를 벌며 남편이 깨어나기만을 바란다. 그렇게 희주와 영남은 한 직장에서 일하며 잦은 부딪힘으로 불편해진다. 항상 피하는 쪽은 희주였고 영남은 애써 태연한 척 희주를 다독이는 여유까지 보였다. 하지만 영남의 딸 은영(박시후)과 희주가 만나면서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은영은 교통사고 전 자신이 본 상황의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두렵고, 엄마는 이를 철저히 숨기라 종용했다.
▲ 영화 <빛과 철> 스틸컷 |
ⓒ 찬란 |
영화는 세 인물의 얽힌 관계가 쌓은 팽팽한 알력, 뚜렷이 경계 지을 수 없는 예상 밖의 결과를 조심스럽게 들춘다. 듣고 싶지 않은 말, 해서는 안 될 말, 침묵해서는 안 되는 말을 되뇌며 갈등하는 심리묘사가 예사롭지 않게 펼쳐진다. 그동안 희주를 짓눌렀던 가해자라는 죄의식, 영남 혼자 떠안고 있던 진실의 무게, 은영의 침묵할 수밖에 없는 고단함이 배어 있다. 당사자의 부재가 만든 제삼자의 이익과 욕망, 슬픔이 씻을 수 없는 낙인처럼 가슴속에 서려 있다.
▲ 영화 <빛과 철> 스틸컷 |
ⓒ 찬란 |
<빛과 철>은 배종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세 인물의 감정이 몰입감을 끌어올리며 외면받았던 하청업체와 산업재해에도 빛을 비춘다. 김시은, 염혜란, 박지후의 연기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진가를 드러낸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빛과 철의 의미에 한 걸음 다가갈 용기가 생긴다. 하지만 쉬이 좌석에서 일어나지 못해 어둑한 내면으로 빨려 들어간다. 관객은 서서히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에 완전히 잠식당한다고야 만다. 사고 현장을 지키고 서 있던 다 쓰러져가는 나무만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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