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위안부논문 파문에 한 마디도 못하는 정부
위안부합의 입장도 오락가락
정부 5년차 대일관계 원칙이 없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한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위안부 논문’을 향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확산하고 있지만 정작 피해당사국인 우리 정부는 입을 다물고 있다. 정부는 학자 개인의 연구에 불과하다며 의미를 축소한 채 일절 대응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같은 정부의 ‘의도적 무시’는 중국 당국과 미국 정부의 부정적 입장이 나오면서 우리도 단호한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키웠다. 이에 대해 박근혜정부 당시인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다가 공식합의로 인정하는 등 갈지자 행보를 보였던 정부가 스스로 입지를 위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문재인정부 출범 5년차를 맞는 동안 우리 정부가 스스로 대일관계에 있어서 오락가락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는 우리 정부의 “학자 개인의 연구에 대한 정부의 구체적인 입장 표명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공식 입장을 군색하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더욱이 외교부와 여성가족부는 램지어 교수 논문 파문이 확산하던 때 이미 검토를 마쳤음에도 별다른 대응없이 사실상 방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학자 개인의 연구에 국한하더라도 위안부 문제가 인류 보편의 가치인 인권 문제와 결부돼 있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 왜곡이라면 정부가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 외교소식통은 21일 “지금이라도 (피해국으로서) 입장 표명을 하는 게 좋긴 하겠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고 진단했다.
정영애 여가부 장관은 지난 18일 “이 논문이 정부가 대응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논문인지 (의문)”이라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바로바로 대응하는 게 적절한지 고민하고 있었다”고 해 논란이 일었다. 이 발언을 놓고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너무나 안일한 인식이자 대단히 부적절하고 무책임한 발언”이라며 “정부는 위안부 역사 왜곡을 방지하는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정부는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파기한 적이 없었다”며 ‘2015년 위안부 합의가 공식합의임을 인정한다’는 문구가 포함된 입장문을 냈고, 판결에 따른 강제집행도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토니 블링컨, 웬디 셔먼 등 당시 위안부 합의를 추동한 사람들이 미국 국무부에 포진해있어 이를 의식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더욱이 정부가 2015년 위안부합의를 인정하지 않다가 이를 사실상 번복한 것은 일본에 대한 사과 요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정부는 2017년 ‘위안부합의 검증 외교장관 직속 검토 TF’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 총리의 사죄와 반성 표명, 일본 정부의 예산 출연을 전제로 한 재단 설립이 합의 내용에 포함된 것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9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위안부 합의에 사죄와 반성의 마음이 표명됐다고 한 만큼 문 대통령의 사죄 요구는 위안부 합의를 공식화한 것과 배치된다는 시각도 있다.
최근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계기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방안이 급부상했지만 정부는 “할머니들의 의견을 좀 더 청취해보겠다”며 신중한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은 ‘주권면제’를, 한국은 ‘전시여성의 인권 문제’를 다툴 것이어서 안건 자체가 성립될 수 없고, 인권으로 다툰다 해도 우리 정부가 패소할 경우의 수를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패소하게 되면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우리 정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게 힘들어진다”며 “이런 부분 때문에 정부로선 ICJ 제소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ICJ 제소를 운운하는 일본 정부에 ‘무대응’이라는 소극적 태도로만 대응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 할머니가 ICJ 제소를 요구한 것도 ICJ 재판 과정에서 일본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할 수 있고, 이런 위안부 피해자의 역사를 국제기록에 남기는 의의를 거둘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여당은 이 할머니의 뜻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 촉구 결의안’을 발의해 지난 1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상정했다.
김영선 손재호 기자 ys8584@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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