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상징 '황소상'..조각가 모디카 사재 털어 불법설치한 이유

김선미 2021. 2. 2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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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블랙먼데이에 '미국 경제 회복' 상징 제작 결심
이탈리아 조각가 아르투로 디 모디카가 암 투병 중 별세했다. [AP=연합뉴스]


미국 뉴욕 월가에서도 금융의 중심으로 꼽히는 뉴욕 증권거래소 근처에는 ‘돌진하는 황소상(Charging Bull)’이 자리 잡고 있다. 주식 시장에서 ‘상승장’을 뜻하는 황소의 상징 때문에 동상의 뿔이나 급소 등을 만지면 재운(財運)이 들어온다는 속설이 돌면서 매년 관광객이 몰린다. 월가의 상징이자 뉴욕의 랜드마크가 된 이 동상을 만든 건 이탈리아 조각가 아르투로 디 모디카다.

21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는 “조각가 모디카가 80세의 나이로 고향 시칠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전날 그가 살던 비토리아 마을은 “모디카가 암 투병 중 자택에서 별세했다”는 성명을 냈다.

모디카가 자신이 제작한 황소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동상은 뿔이나 급소를 만지면 재물운이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다. [EPA=연합뉴스]


WP에 따르면 모디카는 1987년, 개인 재산 35만 달러(약 3억8000여만원)를 털어 황소상을 제작했다. 무게 3.2톤, 길이 4.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이 황동상은 그해 10월 주가가 대폭락한 ‘블랙 먼데이’ 사태로 시작됐다. 세계 자본주의의 총본산인 월가가 무너지는 걸 본 모디카는 미국 경제의 회복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12월 16일 밤, 모디카는 친구 40여 명과 크레인을 빌려 황소상을 기습 설치했다. 당국의 허락은 받지 않았다. 그는 이달 초 이탈리아 언론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작전 시간은 단 5분뿐이었다”며 “몇 차례 정찰한 결과 경찰이 7~8분에 한 번씩 순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뉴욕시는 허가 없이 세워진 불법 설치물이라며 철거하려 했지만, 뉴욕 시민의 반대로 황소상은 현재까지 지역 명물로 남게 됐다.

2017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세워진 '두려움 없는 소녀' 동상. 황소상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모디카의 비판에 이듬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AP=연합뉴스]


모디카는 지난 2017년 황소상 맞은편에 세워진 ‘두려움 없는 소녀’ 동상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투자자문사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SSGS)는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기념해 소녀의 형상을 한 동상을 황소상 맞은 편에 세웠다. 당찬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린 소녀는 마치 황소에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월가에 여성 임원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것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은 동상이었다.

하지만 모디카는 “양성평등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녀상이 세워지면서 황소가 가진 회복·힘·자유의 의미가 퇴색됐다”고 반발했다. 황소상이 위력을 가진 존재로 비친다는 것이었다. 결국 2018년 12월, 뉴욕시는 소녀상을 증권거래소 앞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뉴욕을 사랑했던 모디카는 투병 전까지 40년 넘게 뉴욕에 머물렀다. 10대 때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자 18세에 집을 나와 피렌체에서 미술을 배웠다. 60년대 후반엔 영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헨리 무어와 함께 예술 활동을 했는데, 무어는 모디카를 가리켜 “젊은 미켈란젤로”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이후 73년 소호 부근에 미술 스튜디오를 열면서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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