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범 내려온다

2021. 2. 20.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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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섭 경제부 기자


칼럼 명색이 ‘창(窓)’인데, 문득 창밖을 본 지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돌렸다. 군데군데 때가 끼긴 했어도 나름 투명한 창문을 경계로 바깥은 어둠이 가득했다. 아직 반달이 되지 못한 초승달마저 없었으면 한 치 앞도 안 보였겠지 싶다. 고릿적이라면 범이 나올까 두려워했을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현대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에겐 달을 쳐다보며 지인들과 와인 한 잔 곁들이는 풍류마저 있잖은가. 그 행렬에 편승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정작 달과 어둠을 쳐다보니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범이 내려오는 것도 아닌데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지난 설 연휴 때 안부전화를 하며 들었던 지인들의 한숨 소리가 전염된 탓일지도 모른다.

첫애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0여년 지기 친구는 수화기 너머로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직장도 불안하고 요즘 참 그렇다”며 말끝을 흐렸다. 코로나19가 일자리를 앗아가지 않을까 걱정이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입장이라 더 그렇겠구나 싶다. 기우라고 달래주고 싶었지만 선뜻 입이 안 떨어졌다. 코로나19가 불러온 고용 충격이 외환위기에 비견되는 수준이니 할 말이 없다. 통계청이 지난 10일 발표한 고용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취업자 수는 전년 동월 대비 98만2000명이나 줄었다. 외환위기 여파가 극에 달했던 1998년 12월 이후 월 기준으로는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도소매 및 숙박·음식점업 취업자 수 감소폭이 58만5000명에 달한다. 친구의 일자리가 이 수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정도가 그나마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애를 괜히 낳았나 싶어”라는 뒤이은 말은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든다. 진심은 아니겠지만 자칫 일자리라도 사라지면 어떻게 애를 먹여 살리겠냐는 자조가 묻어 있다. 이번에도 국가가 도와줄 거니 안심하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영아 예방접종과 건강검진이 지원되고 양육수당이 주어지고 현 정부 들어서는 아동수당까지 생겼다. 아이 키울 때 돈 덜 들일 수 있도록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일자리가 불안하면 애를 키우기 어렵다는 세간의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가임 여성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합계출산율이 1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자리 대통령’을 표방한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은 코로나19 발생 1년 만에 무용지물이 됐다.

사라지는 일자리야 코로나19 때문이라지만 의식주의 한 귀퉁이인 ‘주(住)’까지 한숨짓게 만드는 건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서울 구로구에서 8000만원에 전세를 살고 있는 한 임차인은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오는 4월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는 와중에 집주인이 전세보증금 인상 없이 계약을 연장하자고 한 점을 들었다. 가족이 들어와 산다고 나가라고 했다면 방법이 없었던 상황이다. 가파르게 뛴 주변 시세를 고려했을 때 옮길 곳이 마뜩잖은 와중이었다. 혹여 일자리가 사라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판국에 집 문제까지 속을 썩이지 않도록 된 점이 다행스러웠을 수 있다. 정치권이 약자인 세입자들을 돕겠다며 만든 ‘임대차 3법’이 지난해 7월과 8월에 국회를 통과한 이후 빚어낸 안쓰러운 풍경이다. 서민들에게 풀기도 힘든 괴상한 숙제를 떠안긴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다.

차라리 어둑한 밤을 틈타 범 내려올까 걱정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다. 사서오경 중 예기에 나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2000여년 전 공자의 가르침은 현재도 유효하다. 당시에는 폭정과 압정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실정이 문제라는 점 정도가 차이일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가혹한 정치의 핵심이었던 무서운 세금마저 현실과 일정 부분 겹친다. 기획재정부가 최근 발표한 지난해 세수 통계를 보면 국민 개개인이 내는 증권거래세와 양도소득세는 전년 대비 각각 95.8%, 46.9% 증가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이들이 내는 종합부동산세(34.8%)와 상속증여세(24.6%) 증가율을 크게 웃돈다. 국민 모두 부자가 돼서 세금을 더 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런 판타지 동화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달빛이 유독 처량해 보이는 것도 이런 현실들이 맞물린 탓인가 싶다. 한때 운치 있어 보였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당분간은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틀어야겠다.

신준섭 경제부 기자 sman32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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