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던 돌담, 그 길을 따라가니

차노휘 2021. 2. 1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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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제주 올레] 제3코스-온평-표선 올레(총 14.6km)

[차노휘 기자]

 올레 화살표가 있는 풍경
ⓒ 차노휘
'눈'이라는 붓

눈보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올레 리본만 따라가면 몇 시간 지나서 종점에 이를 것이다. 제3코스로 드디어 뛰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주민들과 올레 탐사 팀들이 새롭게 개척했다는 연듸모수 숲길을 10분 정도 걸었을 때였다. 리본이 자취를 감췄다.

소나무 숲과 간간이 보이는 밭 그리고 시야를 가리는 눈발. 잠깐 멈춰 서서 네이버 지도를 보며 위치를 가늠했다. 그때였다. 연두색 야광 방수 바지를 입은 올레꾼이 곤경에 빠진 주인공을 구하러 오는 산신령처럼 등장한 것이. 하지만 그도 나처럼 길을 잃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본 리본이 있음직한 곳으로 되돌아갔다. 역시나, 숲과 밭을 경계 짓는 임도로 내내 안내했던 화살표가 90도 각도로 방향을 바꿔 울창한 숲길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일정한 속도로 걸었던 다리는 앞으로만 나아갔던 것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좁은 숲길로 들어섰다. 겨울이어도 여전히 푸른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오솔길은 숲이 방풍림 역할을 해준 덕에 바깥보다 온화했다. 하지만 내 온기를 빼앗아갔던 바람을 잠시 쉬게 하더니 더 강한 바람이 부는 해안가로 곧장 던져놓았다.
 
 풍경2
ⓒ 차노휘
 
손을 얼게 하는 추위와 상관없이 나는 넋 놓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로 내리는 눈송이는 한 폭의 유화였다. 울퉁불퉁 해안가를 뒤덮은 현무암 바위에도, 잿빛 캔버스 같은 하늘에도, 쉬지 않고 거친 파도를 실어 나르는 바다에도 연신 하얗게 붓질을 하고 있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길게 둘러 있는 성벽인 환해장성(環海長城)까지도 말이다.

2210m의 온평리 환해장성

환해장성은 제주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돌담이다. '탐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릴 만큼 그 길이가 무려 300여리(약 120km)나 되었단다. 지금은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14곳)만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보고 있는 온평리 환해장성은 온평리 하동 해안가에서 신산리 마을 경계까지 2120m라고 한다. 다른 곳보다 비교적 긴 편인 셈이다.

성벽인 만큼 환해장성을 쌓은 목적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곳 제주 해안가 성벽은 조금 다른 '적'이다. 고려 말기 삼별초(三別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온평 환해장성
ⓒ 차노휘
 
그 당시를 잠깐 정리해보면, 고려 고종 19년(서기 1232년)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遷都)했던 조정은 무신정권이 무너진 뒤 몽고와 화친을 맺게 된다. 그런 뒤 원종 11년(서기1270년) 강화에서 개경으로 38년 만에 환도(還都)한다.

몽고와의 굴욕적인 강화(講和)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가 용장성(珍島 龍藏城)을 쌓아 항거한다. 얼마 가지 못해 여몽 연합군에 의해 본거지를 잃는다. 한 수 앞선 조정은 진도를 탈출한 삼별초가 제주도로 향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영암부사를 보내어 해안가에 성곽을 구축하게 한다. 그것이 환해장성의 시초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도에서 제주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제주의 관군을 물리치고 상륙에 성공한다. 환해장성의 주인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 뒤로 환해장성은 여몽 연합군을 물리치기 위한 성곽으로 활용된다. 삼별초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에는 왜구의 습격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오늘의 나에게는 해안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벽이 되어준다.
 
 눈 옷 입은 돌하르방
ⓒ 차노휘
 
방풍벽을 따라 신산포구에 이르자 눈보라는 우박을 동반한다. 태어나서 우박을 처음 맞아본 사람처럼 나는 신기해하며 동영상을 촬영했다. 동영상 속 풍경은 그야말로 잿빛 침묵이다. 텅 빈 2차선 도로,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잔뜩 웅크린 바닷가 마을.

숨을 쉬고 있는 거라고는 여전히 광풍을 배달하는 파도와 후두둑 떨어지는 우박이다. 이 풍경 속에 나만 홀로 버려진 듯하다.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드는 이유는? 고개를 들어 앞서가는 야광 바지를 찾는다. 그는 잔뜩 고개를 숙이고 우박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가고 있다. 그와 '연대(連帶)'를 할까,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질문이 터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떻게 삼별초가 완벽하게 환해장성까지 구축했던 관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관군은 삼별초가 올 거라는 정보까지 입수한 상태였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완전히 패전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관군과 삼별초가 내통한 것이 아닐까?

야광 방수 바지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고 나도 그처럼 잔뜩 고개를 숙이고는 내가 던진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답을 찾는 것이 추위를 이기는 한 방법인 듯이 말이다. 그들이 내통한 이유는 딱 한 가지일 것이다. 조정이 백성에게 신뢰를 잃었다? 이 추위보다 더 혹독하게 백성을 대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내 답변에 만족해하며 웃었다. 갑자기 멈춰 선 야광 방수 바지도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당황한 나는 얼른 얼굴을 굳혔다. 그는 내가 쳐다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도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동안 지나왔던 마을들은 깊은 침묵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손끝에 닿아 있는 건물은 밝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중간 스탬프가 있는 신산리 마을 카페에 도착한 것이다.

눈이 만든 천국
  
 신풍신천바다목장 올레길
ⓒ 차노휘
 
제3코스는 총길이가 14.6km이다. 비교적 더 긴 A코스(20.9km)가 있지만 그 길은 중산간지대로 향한다. 날씨가 궂어서 B코스를 선택해야 했다. 출발지점에서 7km를 걸었을 때 중간 스탬프 박스가 있는 신산리 카페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을 주민들이 운영한다.

나는 카페로 들어가서 햇살이 제일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젖은 신발과 양말 그리고 방수 점퍼까지 벗고는 내가 조금 전에 걸어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땡처리' 물건처럼 내 앞에 펼쳐 있었고 실내 공기는 젖은 머리카락과 붉은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야광 방수 바지는 홀 한 가운데에 앉았지만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이곳에서 굳이 그와 연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곧 커피는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며 내 앞에 놓였다. 그야말로 안에서 바라본 바깥은 천국이었다. 걷지 않고 반나절을 이 카페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커피 한잔에 몸을 녹이고는 눈보라 속으로 다시 발을 디뎠다. 여전한 강풍을 품에 안고 신풍포구를 지나 바다 절벽을 끼고 있는 신풍신천(新豊里∙新川里) 바다목장으로 들어섰다. 광활한 초지에 눈이 쌓여 있었지만 입체적인 구름 속에서 쏟아지는 한 줄기 햇살이 목장 풍경을 다시 천국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천국에 있으니 천사인 게 분명했다. 
  
 풍경1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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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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