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22

이병길 2021. 2. 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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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졸업 뒤 구세단을 결성하다

[이병길 기자]

1915년 졸업과 비밀결사 운동

1910년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인 조선이 되었다.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과 같이 무장투쟁을 주장하거나, 실력을 키워 일본을 이기자는 실력양성론도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강자인 일본은 열등한 조선을 동화시키려 하였다. 사회진화론에 따라 식민지 조선은 문명국 일본에 따라야 했다. 윤치호 말처럼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는 비굴함이 점점 조선에 팽배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백성이 되는 가운데, 또 자주 독립의 꿈을 키우는 사람이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경제는 군비확충을 위주로 한 과잉투자에 의한 불황과 증세 수탈에 노동자, 농민, 소자본가의 고통은 점차 가중되었다. 민중 폭동과 군부의 쿠데타가 발 생할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유럽에는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유럽에는 세계 제1차대전이 벌어졌다. 일본 경제는 춤을 추는 상황이 되었다. 제국주의 간의 전쟁 특수로 일본의 경제는 발전했다. 비행기, 전차, 독가스 등의 새로운 무기가 출현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를 지지했다. 반대편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일본 군경에 의한 물자의 징발과 인력의 강제 동원이 더욱 격심해졌다.
 
▲ 부산공립상업학교 4회(1905.03) 졸업사진 맨 윗줄 좌측 세 번째 박재혁, 6번째 최천택이다. 아래 중앙 강아지 뒤가 일본인 교장이다. 당시 교사들은 모두 제복과 칼을 차는 등 위협적이었다. - 사진 제공 : 박재혁 손녀 김경은
ⓒ 박재혁 손녀 김경은
 
일제의 무단통치는 제국주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가혹한 식민지 지배방식이었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문명화는 침략의 논리이자 지배의 수단이었다. 그것은 제도로 정착되었다. 조선 총독은 내각의 감독을 받지 않고 일본 천황에 직접 예속될 뿐이었다. 또 입법·사법·행정 및 군 통솔권도 지녔고 경찰까지도 직할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총독의 총칼 아래 독립운동은 위축되었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발전하고 조선의 경제는 약탈당했다. 조선의 경제는 악화하고 민생고는 더 격심해졌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시들어가고 일본제국주의가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전쟁 기간 일본은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했으며,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모해갔다. 중화학공업이 발달하고 독점자본주의가 일본을 지배하였다. 조선의 민족자본과 산업 육성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계급투쟁에 의한 민족해방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지식인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1910년대는 독립운동 방식에 대한 다양한 모색과 준비의 시기였다. 여전히 평민 중심의 의병운동은 지속되고 있었고 피지배자가 정치의 주체로 굳건히 서고 있었다. 해외 독립군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황제의 나라가 아닌 백성의 나라를 추구했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은 식민지 조선을 떠나 중국, 북간도와 미국, 연해주에서 혁명단체를 만들고 교육을 하고 군대를 양성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식민지 조선에 남은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을 거부하거나 순응하였다. 또 일부는 식민지 조선의 심장에 독립의 불꽃 심지를 심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1910년대 국내 항일운동은 비밀결사가 대사였다. 총독부의 무단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다른 대안이 없었다.

세계 제1차대전이 벌어진 지 얼마 후인 1915년 3월 박재혁, 최천택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21세의 꿈 많은 청춘인 박재혁과 최천택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집안에 대한 경제적 책임을 져야 했다. 친구들도 각기 자기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20대였다. 최천택은 졸업 후 합천(陜川)금융 조합에 취직했다. 당시 조합 서기로 있었던 인연으로 1925년 1월 최천택은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다.

1924년 12월 합천의 부자 이경상, 노호용, 이종연을 찿아간 최천택은 대한독립의열단원이라며 군자금을 모집 중이니 금전을 달라고 하였으나 받지는 못했다. 당시 청년 17명이 검속되었는데 최천택과 항일 무장투쟁단체인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1892~1929)의 아우 편덕렬, 박운표를 제외하고는 방면되었다. 최천택은 예심(豫審)으로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심문을 받던 중 기소유예로 1925년 2월 6일 방면되었다. 편덕렬(1897~1976)은 1919년 이후 북로군정서, 상해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 국내실정 조사원 활동을 하다가 1921년 검거외어 3년 옥고를 치르고, 형인 편강렬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내에 돌아와 정보입수와 군자금모집을 담당하였던 때였다.

박운표(1894년생)은 협천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으로 1921년 협천청년회 회장, 조선청년연합회 활동을 하였는데 당시 협천군 시대일보 지국장이었다. 일제는 독립사상이 강하고 또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계속 구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래 사회혁명 또는 조선독립운동을 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오택은 일본 여행을 하고 돌아온 후 구국을 위한 행동을 모색 중이었다. 오택은 부산상업학교 재학 때 배일사상이 농후한 박재혁, 박흥규, 김인태와 합의하여 부산진지역의 정공단 죽마고우(竹馬故友) 10여 명과 함께 비밀결사대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이름 그대로 일제의 굴레와 억압으로부터 식민지 조선을 구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구세(救世)는 바로 민족해방이요 민족독립이다. 이름이 약간 기독교적이다. 이는 그들의 삶터 주변에 부산진교회가 있었고, 교회를 드나든 인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 후에 쓴 최천택의 자전적 기록인 <일제하 독립 투쟁기>에는 구세단 관련 내용이 없다. 구세단 조직이 1915년이고 그때는 최천택이 합천금융조합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천택 자료를 정리한 1983년 김홍규의 증언 이후 구세단 관련 자료가 나왔다. 최천택에 따르면 1914년 봄에 구세단이 결성되었다. 구세단 결성시기가 1914년 봄이라면, 구세단 적발로 체포된 박재혁과 최천택은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흥규와 김인태는 부산공립상업학교 졸업 명단에는 없다. 그들은 부산상업학교와 관련한 증언과 기록이 없다.

다만 김인태는 1910년에서 1914년까지 일본 오카야마(岡山)시 김고(Kim Ko)중학교에서 공부한 후 한국에 귀환했다. 1915년 그는 상해로 가서 우성(Woosung)에 있는 동제대학(同濟大學)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였다. 김인태가 부산에 온 1914년에서 1915년 겨울 사이에 구세단 사건이 일어났다.

비밀결사 조직, 밀양의 일합사와 대구의 대한광복단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할 때, 부산항공립개성학교 생도들도 참가하여 20원 50전을 기부한 적이 있다. 구영필(具榮必, 1890~1926)도 있었다. 부산 기장 출신이지만 15살 때 외가인 밀양으로 이사를 했다. 개성학교에서 배운 일본어를 토대로 1908~10년 경성 공업전습소 도기관(陶器科)를 졸업했다.

1913년부터 간도를 오가다가 1915년 9월 조선에 돌아온 후 표면상 정미업과 운송업 등을 경영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국권회복운동의 방법을 고려하는 중에 드디어 결사 조직인 일합사(一合社)를 기획하였다. 일합사의 단원은 구영필·김대지·황상규·장인환·안곽·명도석·남정섭 등이었다. 구영필은 일우(一友), 김대지는 일봉(一峰), 이수택은 일몽(一夢) 등 자신들의 호(號)를 '일(一)'자 돌림으로 지어 '일합(一合)'으로 칭하여 '일합사'를 조직 하였다. 훗날 일심사(一心社), 또는 사회회사(社會會社)의 명칭도 사용하였다.
"일합사란 조국독립을 위하여 청춘의 일편단심을 합한다는 뜻이었다.… 형식상 마음을 합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친목단체처럼 만들어 놓고 우리들은 항일투쟁의 때가 오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때의 동지들은 주로 밀양사람이 중심이었고 대구와 마산 등지의 동지들과도 서로 연락하여 기맥을 통해가면서 결속하고 있었다. … 윤세주·구영필·윤치형 등이 체포되어 4개월을 두고 취조를 받았으나 뚜렷한 죄목이 있을 리 없어 결국 불기소로 방면되었다."

그런데 윤치형의 증언과는 달리 1916년 이후 평양경찰서 경부 김태석 등의 잔혹한 고문에 의해 장인환이 치사된 대사건이었다. 특히 김대지는 8개의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고 4개월을 복역했으며, 구영필 역시 오른쪽 다리를 상하여 지팡이에 의존하는 심한 장애를 겪으면서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일합사는 1913년 결성 당시부터 단원들의 행동 강령과 지침인 규약을 가진 비밀결사였다. 특히 김대지(1891~1942)가 기초한 합사진행책(合社進行策)은 서간도의 군사기지 설치와 같이 국내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외를 거점으로 장기적인 독립전쟁을 모색한 무장 투쟁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국내외에 식민통치의 실상과 해독(害毒)을 국내외에 널리 알려 독립쟁취를 위한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독립단원은 계급적으로 중류 이상의 통상과 특별 사원으로 구분하여 조직하며, '실업 발전책'으로서 각 지방 요지에 농상조합(農商組合)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독일식 군제(軍制)를 도입하되 서북간도에 군사 근거지를 설치하고, 비행기를 제작하며, 일제의 외교를 저지하면서 중국·독일·미국의 지지 획득과 함께 대만·인도·월남의 지사들과의 결속 등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합사진행책은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단체 중에서 각 분야에 걸친 독립운동 방략을 제시하고 있었다. 합사책의 운동방략은 기존의 조직체계를 쇄신 확대하여 새로운 활로를 찾고, 국내외를 연계한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배경에서 도출되었다. 하지만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300여 명의 사원을 확보하지 못한 채 구영필과 김대지 등의 체포로 사실상 일합사는 와해하였다.

일합사의 활동은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 단체와의 유기적인 연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였던 광복회는 밀양 출신들이 중심이었던 일합사 단원들의 가세로 더욱 확장되었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 정월 채기중(1873~1921)이 풍기에 이주해 살고 있던 전원식·정성산 등과 조직한 비밀결사로 16명의 구성원 명단이 확인되고 있다. 풍기는 정감록(鄭鑑錄)에 등장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구한말의 격동 속에 팔도 이주민의 출입이 빈번한 지역이었다. 인구 이동이 잦아 의병 지사들이 암약하기 유리하였다. 광복단의 활동 목표와 방략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금이었다. 이를 위해 채기중 등 주도 세력들은 서간도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꾀하였다. 풍기광복단은 의병계열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이나, 이미 조직 당시부터 근대를 지향하고 공화정으로 전화하는 혁명적 비밀결사로의 발전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한광복단의 창설단원인 유창순·유장렬·한훈·강순필·김병렬·김상옥·정운홍·정진화 등은 의병 출신과 지사들이었다. 이후 일합사 단원들인 황상규·김대지·이각 등 밀양 출신 청년 지식인 집단의 영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15년 박상진(1884~1921)이 정운일·김대열 등 조선국권회복단의 강경파들을 이끌고 합류함에 따라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일합사, 풍기광복단, 조선국권회복단이 합류하여 대한광복회가 1915년 7월 대구에서 조직되었다. 박상진은 총사령에 추대되었다.

대구의 박상진과 풍기의 채기중은 상호 연락을 통해 만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고 전국에 출몰하면서 부호의 금고를 강탈 군자금을 모았다.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하며 활동하다가 1918년 초 박상진, 채기중 등 지도부와 회원들이 검거됨으로 조직이 1918년 말경 붕괴하였다.

의열단은 밀양의 일합사, 풍기의 광복단. 대구의 대한광복단의 인적 구성원을 계승하였다. 1919년 11월에 길림성 파라호에서 결성된 의열단의 창단 인물은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재기·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인이었고, 단장에는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당시 창단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김대지와 황상규, 구영필 등 그리고 정공단의 김인태, 김병태 형제와 오택(오재영), 박재혁, 최천택 등도 의열단 초기 단원이었다.

부산진 정공단 아이들, 구세단을 조직 활동하다

일합사와 광복단에는 황상규, 김대지, 이각 등의 밀양 출신의 중복 가입자가 있었고, 결성 시점도 비슷했다. 일합사는 마산-밀양-대구로 연계되는 청년 친목단체로 위장하고 결성되어 때를 기다리던 일종의 항일 비밀결사였다. 두 단체에 가입한 점은 지역적 연대와 교류를 통한 연합활동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대한광복단의 지방 조직으로 일합사가 경남지역의 구심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일합사 조직은 회원 확장을 부산에도 시도했을 것이다.

1913년 이후 오택과 최천택, 김원봉의 경남 지방 등지의 무전여행은 비밀결사 조직을 하기 위한 작업인 동시에 비밀결사 조직원을 확대하기 위한 것일 수있다. 밀양과 부산 출신의 만남 지점에는 김인태가 있었다. 김원봉이 1914년 봄 명승고지를 찾아 무전여행을 할 때 부산에서 김철성(金鐵城)을 만난다.

"김철성과는 장래 국사를 위하여 서로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을 굳이 맹세하였다."

김철성, 철옹성 같은 심지를 가진 사람의 별칭으로 보인다. 그가 바로 김인태였다.

오택에 따르면, 구세단은 1915년 부산진 정공단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박재혁과 박흥규, 김인태가 중심이 되고 부산진의 죽마고우 10여 명이 추가되었다. 최천택(부산진공보1회, 부상4회)은 박재혁(부산진사립, 부상4회), 오택(부상4회 중퇴), 김병태, 김인태, 왕치덕(부상 3회), 김영주(부산진공보2회), 장지형(부산진공보2회), 조영상 등 동지 16명이라고 하였다. 동국역사 배포 사건 주모자는 최천택, 박재혁, 김병태, 박흥규이지만, 구세단 사건의 주모자는 오택, 박재혁, 박흥규, 김인태이다. 중복되는 인물은 박재혁과 박흥규이다.

대부분 정공단이 있는 부산진보통학교 출신과 부산상업학교 출신으로 정공단 인근에 거주한 사람들이었다. 즉 지연과 학연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단체였다. 이는 전통적인 인간관계를 통한 신뢰감, 유대감이 조직 보호에 중요했기 때문이다. 선후배와 친구, 이웃사촌이 의형제로, 혁명적 동지애로 나타났다.

1915년 어느 날 오택의 집에 정공단 아이들이 모였다. 오택은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 구국을 위한 방안으로 비밀조직을 만들기로 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최천택은 합천에 있는 금융조합에 취직하여 부산에 없었다. 박재혁은 학교를 졸업했지만, 아직 취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전쟁이 일어나고 조만간 일제는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 총독부의 감시가 심해 공개적 활동은 하기 어려우니 비밀리에 민중계몽운동을 해야 할 것 같네."

오택이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 하자, 재혁은 오택에게

"조직 이름은 생각해봤나?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을까?"

"구세단이 어떨까? 세상을 구원하는 단체. 구원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중요할 것 같네. 그래서 <구세단보>를 발행할까 하네."

모두 오택의 생각에 공감하고 조직 이름과 활동에 동의했다. 오택은 구세단보 발행에 관해 설명했다.

"<구세단보>는 매월 월간 잡지로 발행했으면 하네. 이미 등사판은 구해놓았네. 매월 한 사람이 한 문제를 기고했으면 좋겠네."

"그럼 역할을 나누어서 해야 하지 않을까?"하고 인태가 말을 했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의 정세에 남보다 잘 알고 있어서 일본 관련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음, 박흥규는 출판을 담당하고, 나와 김인태는 재정을 담당하겠네. 재혁이 형님은 전제적인 상황을 관리했으면 좋겠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 있는 동지를 규합하거나 출판물을 배포하는 활동을 했으면 좋겠네요."

김영주가 덧붙여 말을 했다.

"<구세단보>를 발행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니 민중 계몽을 위한 활동을 했으면 해. 그리고 조직을 부산에만 한정하기보다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때 김인태가 일전에 만났던 김원봉을 떠올렸다.

"밀양에 사는 김원봉이란 친구가 있는데 구국의 열정이 대단해. 그 친구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있으니 그 친구를 <구세단> 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어떨까?"

"오, 좋은 생각인데. 그 친구에게 연락해서 한번 오게 합시다."

며칠 뒤 부산에 온 김원봉과 구세단원들은 수삼일간 담론을 한 후에 김원봉이 각지의 선전을 맡기로 하였다. 여러 동지는 또 경남 각지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출판물로써 의사소통하고 수시로 수양강좌와 실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렇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구세단은 하였다. 구세단 활동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구세단 활동을 시작한 지 반년여 만에 일제 경찰에 탐지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부산경찰서 형사들이 오택의 집에 들어와 가택수색을 하였다. 인장과 동사판을 모두 압수당하였다. 당시 부산경찰서 서장은 경시(警視)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이었다. 바로 1920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척 대상이었던 서장이 1911년부터 부산경찰서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오택, 박재혁. 박흥규, 김인태는 구속되어 일주일간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하시모토 서장은 "어린 녀석들이 뭘 안다고 까불대는지 모르겠다"라며 혀를 찼다. 경찰이 파악하기에 구세단의 활동이 일본 통치에 장애가 될 정도의 심각한 조직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계몽적 내용의 <구세단보>와 수양강좌였기에 미미한 활동으로 보았다. 괜히 문제를 크게 키우면 부산지역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었다. 그동안 부모님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구세단 해산을 조건으로 무사 방면하였다. 하지만 구세단원들은 그날부터 요시찰 인명부에 등록되어 감시를 받았다. 이때 박재혁은 하시모토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최천택은 구세단이 "전국 규모의 조직을 가진 항일투쟁단체였다."라고 하였다. 최천택은 구세단을 재건하기 위해 만주 혼춘에서 구(舊) 한국군을 거느리고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황병길(黃炳吉, 1885~1920)과 제휴하기 위해, 1917년 김병태, 장지형을 북간도로 밀파했다. 그동안 최천택과 동지들은 무력봉기를 준비했다. 1년 6개월 뒤에 김병태와 장지형은 황병길을 만나고 돌아왔다.

1918년 5월 황병길은 훈춘시찰단을 이끌고 경성에 왔다. 그때까지 일제에 호의적이었던 그는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이후부터 '훈춘의 호랑이' 황병길 장군으로 본격적인 항일무장 투쟁을 하였다. 시기적으로 최천택의 시도와 맞지 않다. 현재 <구세단보>가 발견되지 않고 구세단 관련 인물들의 구체적 증언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세단의 구체적 활동 증거가 없다. 일합사나 광복단과의 교류 등의 관련성은 있지만 역시 구체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박재혁과 김인태, 상해로 가다

구세단 사건 이후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정공단 동지들은 새로운 모색이 필요했다. 1915년 가을, 구세단 사건 이후 김인태(金仁泰, 1896~?)는 무전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김인태는 세계일주여행을 계획하고 김원봉을 만나 향후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논의하려고 왕치덕, 오택과 함께 밀양을 방문했다. 약속하고 갔지만 김원봉은 이미 밀양을 떠났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사오일 머물렀지만, 만나지 못했다. 세 사람은 밀양 영남루를 배경으로 종이 한 장을 같이 들고 독립운동을 결의하듯 나란히 석별 기념사진을 찍었다.
 
▲ 김인태 세계일주무전기행 사진 - 밀양에서 영남루를 배경으로 좌측부터 김인태, 왕치덕, 오택이다. 이들은 해방 후 김원봉과 같이 사진을 남겼다. -사진출처 :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3)
ⓒ 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3)
 
김인태는 짚신을 신고 걸망을 진 세계여행을 할 차림이었지만, 동행한 오택과 왕치덕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모두 모자를 썼다. 김인태는 외모가 단단하게 생겼고 야무진 모습이다. 왕치덕은 덩치가 가장 작고 아직 어린 티가 많이 나는 모습이나 옷이 단정하고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 있는 모습이다. 오택은 모유가 떨어져 우유로 수유할 정도의 부유한 집 출신답게 다소 큰 키에 다른 친구들보다 덩치가 크고 좋은 옷을 입고 멋을 부렸지만, 눈매는 날카롭다. 이때 사진에 김원봉이 없었지만, 30년이 지나 해방을 맞이하여 박재혁의 무덤을 방문하고 난 뒤 네 명은 같이 사진을 남겼다.

그 후 김인태는 대구로 갔다. 당시 일제의 감시가 심해 부산서 살기 어려워 명목은 세계일주 무전여행이지만 만주 북간도를 거쳐 중국 상해로 갈 작정을 한 것이다. 김인태, 김병태 형제는 상해에서 서로 만나 김원봉과 의열단을 만드는 데 협력을 했을 것이다. 밀양에 동행했던 왕치덕(王致德)은 부산상업학교 졸업생(3회, 1914년)으로 그 후 의학 공부를 하여 부산에 일광병원을 열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박재혁은 동국역사 배포와 구세단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것이 분명하다. 박재혁은 마음은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지만 경제적 곤란으로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박재혁의 경제적 문제는 늘 그의 삶의 그림자였다. 빈곤의 그림자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아 훗날 항일 독립운동 참여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 박재혁의 부산상업학교 학적부에 인적 사항만 있고 성적, 출결 등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1916년 3월 8일 학교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관련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그의 학창 시절을 엿보기 어렵다. 그는 자료가 없는 독립투사이다. 그의 삶은 친구들의 기록을 통해 엿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구세단 활동 이후 오택과 박재혁은 미국행을 꿈꾸었고 주야로 준비를 했다, 하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먼저 60 노모와 10세 미만의 어린 여동생, 80 노조모 등의 생활문제가 있었다. 또 미국행에 소요되는 많은 여비와 어학이 문제였다. 그래서 박재혁은 어학전공에 몰두하고 오택은 금융에 전력하였다. 오택은 경비 마련을 위해 부친의 인감을 도용하여 대금 빌릴 찰나 발각되어 수포가 되었다.

박재혁은 경북 왜관에 가서 친척 박국선과 기만 원을 가지고 곡물 매매 사업을 같이하였다. 박재혁의 사업자금은 오택이나 김정훈이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알 수는 없다. 1915년 겨울, 박재혁은 거금은 박국선에게 맡기고 2천 원을 가지고 김인태와 왜관을 떠나 상해로 갔다. 박재혁은 오택에게 가족을 당부하고 상해에서 수개월을 기다리겠으니 대금을 마련해서 상해로 오라고 하였다. 오택은 박재혁의 가족을 자주 방문하여 안심시켰다. 오택의 자금 마련은 쉽지 않아 내년에 가기로 하였다.

1915년은 정공단 친구들에게는 격동의 시기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구세단을 조직하다가 적발되어 고문을 당하고 결국은 구세단이 해체되었다. 비밀결사 운동을 하였지만, 결실을 얻지 못해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활동하리라 결심하였기만 쉽지 않았다. 박재혁과 곡물 동업을 했던 박국선의 흔적은 집안의 족보나 경북 왜관에서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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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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