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자영업자의 등장
업종의 경계를 뛰어넘어
한목소리 내는 자영업자들
코로나19는 이들에게
'우리가 약자'란 자각과
집단의식을 갖게 했다
갈등 조정자인 정부가
진지하게 상대해야 할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공개적인 방역 저항이 터져 나온 것은 지난달 4일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헬스클럽이 거리두기 2.5단계 집합금지명령을 어기고 문을 열었다. 관장은 SNS에 이를 알리며 정부를 성토했다. “K방역이 어쩌구 자화자찬만 늘어놓더니 이게 뭐냐. 다 굶어 죽어 간다.” 글 말미에 집단 저항을 촉구하는 문구가 담겼다. “수도권 자영업자 여러분, 내일부터 문을 엽시다!” 그의 업종은 헬스클럽인데, “헬스클럽 관장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았다. 영업제한 업종을 모두 아울러 “자영업자 여러분”을 향해 외쳤다. 그 ‘여러분’에는 노래방 PC방 학원 클럽 실내포차 뷔페식당 단란주점 등 다양한 업종의 상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 제안에 공감해 1000여개 업소가 ‘오픈 시위’를 이어갔다. 나흘 만에 서울 서초구의 한 사무실에서 ‘전국자영업자비상대책위원회’ 준비회의가 열렸다. PC방대책협의회, 호프음식점연합회, 베이커리비대위, 카페비대위, 편의점비대위 등의 대표가 참석해 활동 계획과 대정부 요구안을 다듬었다. 1주일도 안 돼 자영업자비대위가 발족했고, 방역 기준 조정과 손실보상 입법 등 요구 사항이 정부에 전달됐다. 이달 첫 주에는 당구장협회, 스터디카페·독서실협회, 볼링경영자협회, 스크린골프협회 등이 가세한 19개 자영업 단체가 밤 9시 이후 영업을 요구하며 24시간 오픈 시위를 벌였다. 둘째 주는 자영업자비대위 주도로 PC방 노래방 호프집이 차례로 밤 12시 개점 시위를 했다.
당구장과 독서실, PC방과 헬스클럽, 빵집과 실내포차…. 교집합을 찾기 힘든 이질적 업종의 자영업자들이 이렇게 한목소리를 내고 연대로 발전해 집단화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굳이 꼽자면 2014년 권리금 법제화를 요구하는 집단행동이 있었는데, 당시는 유명 상권의 카페·식당 임차상인이 주축이었다. 헬스 관장과 빵집 사장과 술집 주인이 같은 구호를 외치는 지금의 풍경은 우리가 알던 자영업자의 모습이 아니다.
코로나19는 한국 자영업자들에게 업종을 넘어선 집단의식을 갖게 했다. 정부가 자랑하는 K방역의 차별성은 ‘봉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구에서 했던 “집에 있으라” 식의 전면 봉쇄 없이 생산과 소비가 돌아가게 놔둔 채 검사·추적·치료로 바이러스를 차단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1~3차 유행을 겪으며 이동과 모임을 일부 제한해야 했는데, 그 타격이 자영업종에 집중되고 말았다. 영업제한으로 내몰린 한계 상황에서 자영업자들은 분노했고, K방역의 최대 피해자라는 상대적 박탈감이 그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약자를 일컫는 말은 오랫동안 ‘노동자’였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 관계에서 피고용인인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했다. 노동조합을 통해 세력화한 노동자의 목소리는 쑥쑥 커져서 정권 창출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문재인 정권이 지지기반으로 삼는 민주노총은 최근 몇 년 새 조합원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100만명을 약간 넘는 정도다. 자영업자는 600만명이다. 한국의 자영업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취약한 사회안전망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자영업 계층이 비정상적으로 두터워졌다.
그들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어중간한 지점에 있었다. 경제적 지위는 노동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종업원을 두는 고용인이어서 사장님이라 불렸다. 경제민주화니, 저녁 있는 삶이니 하며 약자를 위한 구호가 나올 때마다 자영업자는 정책의 시야에 담기지 못했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 대표적이다. 핵심 정책인 최저임금 인상은 자영업자를 그저 고용인으로 취급했고, 힘겨운 자영업 생계를 더 팍팍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감수하며 4년을 버티던 이들에게서 지금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우리가 약자였다”는 자각과 동병상련의 집단의식을 품은 채 정책과 입법에 조직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잦아든다 해도 이들이 겪은 집단적 상처와 피해의식은 쉬이 아물지 않을 듯하다. 자영업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아프니까 사장이다’에는 임대료부터 전기료까지, 영업제한부터 재난지원까지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글이 연일 올라온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자영업자의 응원 없이는 다음 정권을 차지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다. 갈등 조정자인 정부가 진지하게 상대해야 할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편집국 부국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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