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예술] 이데올로기를 벗은 고암 이응노의 예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제공하는 현대 화가를 한 사람 들라면 주저 없이 고암 이응노(1904~1989)를 꼽겠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 전후 추상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를 무대로 30여년간 활동하며, 동양화라는 매체의 제약과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고, 예술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경계까지를 허물고자 했던 부단한 그의 노력이 바다와 같이 깊고 넓은 작품세계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살게 된 2년 반의 옥살이도, 백건우·윤정희 납치 미수사건으로 인한 ‘간첩 화가’의 낙인도 그의 예술세계를 움츠러들게 하지 못했다.
대전 이응노미술관의 ‘이응노의 사계’전(4월 11일까지)은 잘 알려진 문자추상이 아닌, 1970~80년대 파리시기에 제작한 산수풍경을 전시 중이다. 고암을 대표하는 문자추상은 그림과 글자는 그 원류가 하나라는 ‘서화동원(書畫同源)’의 동양 회화 미학을 기반으로 청동기 표면에 새겨진 고대 문자와 세월에 마모된 비석의 탁본을 회화적으로 변주한 것이다. 화면 구성을 위해 주역 8괘를 원형으로 하는 인장 각법(刻法)을 접목시킴으로써 현대적 조형 언어에 동양의 고전적 미감을 불어 넣었다. 문자 추상은 회화·판화·태피스트리·조각의 각 장르를 관통하며, 한지와 캔버스 외에 융과 나무, 굴껍질과 스트로폼 (옥중 작품에는 간장과 신문지)에 이르는 재료를 실험함으로써 다양한 표현 가능성에 도전했다.
지필묵의 전통 매체만을 사용한 산수풍경들은 문자추상의 뿌리가 자연과 인간에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먹을 듬뿍 묻혀 초서와도 같은 몇 번의 붓질로 압축한 산과 나무의 형상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조국 산천의 심상이다.(사진) 검은 농묵으로부터 옅은 회색에 이르는 다양한 먹의 뉘앙스는 추상과 구상, 동양의 산수화와 서양 풍경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먹·붓·종이의 표현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1980년을 기점으로 고암은 순수 추상에 인간의 형상을 부여했다. 2백호가 넘는 대형 화면에 먹으로 수 천명의 사람(人)을 그려 넣은 ‘군중시리즈’는 광주 민주항쟁에서 촉발된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사람이 만든 제약일 뿐이며 예술이란 뿌리 찾기와 같은 것”이란 작가의 인터뷰를 작품으로 구현한 듯하다. 사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작가와 미술사가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과제를 던지는 고암의 세계는 어떤 화법이나 틀에 가둘 수 없는 현재 진행형의, 한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이자 태도다. 2012년 재단 건립에 이어 2020년 이응노연구소가 문을 열었으니 고암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덧씌워진 이데올로기의 멍에를 걷어내고 예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일 듯하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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