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슬퍼한 그의 사망..600억 전용기 주인 '림보' 누구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침묵을 깼다. 17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 진행한 전화인터뷰에서다.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패배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달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백악관을 내준 뒤에도 공식 인터뷰는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지난달 워싱턴DC 의사당 폭동 사태 이후, 그가 애용했던 매개체 트위터에서도 쫓겨나면서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트럼프가 폭스뉴스와 한 인터뷰는 그래서 더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24분간 방송된 이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의사당 폭동에 대한 견해나 근황, 앞으로의 계획에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 인물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 대상은 지난 17일 별세한 미국 보수 진영의 대표적 논객인 러시 림보였다. 자신에 집중하는 나르시시스트 적 면모를 보였던 트럼프이기에 이례적 일로 받아들여졌다.
림보가 누구길래 트럼프가 이렇게까지 애도했을까. 그는 직설적이고 극단적인 발언으로 1980년대부터 약 20년간 미국의 대표 보수 논객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그가 사망 직전까지 진행했던 3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 '러시 림보 쇼'의 애청자가 1500만명, 연간 수익이 연간 4000만달러(약 443억 원)에 달했다고 전했다. 림보의 주무기는 거침없는 언변이었다. 그는 민주당과 진보주의자를 강력 비판하며 우파 세력을 결집했다. 그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믿는 이들을 가리키는 ‘디토 헤드(ditto head)’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의 사망 소식 역시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해졌다. 그의 부인 캐서린 림보가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다. 캐서린 림보는 마이크를 잡고 청취자들에게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어서 미안하다”며 "남편이 사망했다"고 직접 알렸다. 사인은 폐암 합병증이었다고 WP는 전했다. 그는 자타공인 애연가였고, 지난해 초 폐암을 진단받았다.
인기를 누린 만큼 그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WP는 “림보는 5000달러(약 554만원)짜리 와인을 모으고, 5400만달러(약 598억원)의 전용기를 소유하는 등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고 전했다.
사회적 논란도 많았다. 림보는 90년대 ‘여성 나치(femi-Nazi)’라는 단어를 만들어 여성권리 운동가들을 폄훼해 비판받았다. 또 민주당 소속이었던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무차별 비방하고, 이민자나 기후 변화 관련 정책에도 반대했다.
그의 인기와 흡인력을 공화당 정치인들은 늘 탐냈다. WP는 지난 92년 조지 H. W. 부시 당시 대통령은 림보를 백악관으로 초대해 극진히 대접하고 하룻밤 머물게 했다고 전했다. 연임을 노리던 자신에게 힘을 보태달란 뜻이었다. 부시의 정치 컨설턴트 메리 마탈린은 “우리(공화당)가 믿을 건 러시 림보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이듬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러시 림보의 매력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통했다. 처음부터 둘이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림보는 2016년 대선 경선 당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을 지지하며 트럼프를 맹비난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내 만찬과 골프를 함께하는 절친이 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임기 중에도 림보를 아꼈다. 그는 지난해 2월 의회 국정 연설에서 림보에 미국 민간인에게 수여할 수 있는 최고 훈장인 ‘자유의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주기도 했다. 당시 트럼프는 림보에게 “가장 위대한 투사”라고 평가했다. 림보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미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 “코로나는 일반 감기보다 심각하지 않다”며 트럼프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트럼프와 림보의 우정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WP는 “림보에겐 트럼프와의 공통점이 있었다”며 “기업가·정치인과 교제하고 엘리트와 싸우는 인물로 묘사되는 기술을 터득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림보는 51년 미국 미주리주에서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WP에 따르면, 친구가 많지 않았던 림보는 어릴 적부터 라디오와 친했다. 10대 때 처음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DJ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미주리 주립대학을 중퇴하고 본격 피츠버그 방송국 등에서 일했다. 80년대 후반, 정치 프로그램은 중도를 지켜야 한다는 ‘공정성 원칙’이 철폐되면서 본격 보수 논평가의 길을 걸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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