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경의 '시코쿠 순례'] (4) "아직 젊으니 지금 생각한 일은 지금 하라"
18번 온잔지부터 일정을 함께한 기무라상과 19번 다츠에지(立江寺)에 도착하니 소학교 학생 무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들고 있는 종이를 보니 헨로상 접대 체험이었다. 귀여운 여학생이 다가와 뭔가 주길래 펼쳐 보니 직접 만든 다츠에지 주변 지도였다. 아이들의 오셋타이였다. 기무라상이 받은 것과 비교해 보니 학생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났다. 내가 받은 지도는 꼼꼼하고 자상하게 식당이며 역이며 잘 표시돼 있는 반면, 기무라상이 받은 지도에는 ‘이 집은 맛이 없음’이라고 개구진 표현이 있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20번 가는 길도 헨로고로가시(험하고 경사가 심한 곳)에 속한다. 카쿠린지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렸더니 전날 예약해둔 숙소 가네꼬야가 바로 앞에 있어서 우선 배낭을 맡겨둔 후 카쿠린지로 향했다. 가는 길이 좀 험하기는 해도 막상 올라가 보니 카쿠린지는 아득하고 포근한 절이었다. ‘학의 숲’이라는 이름처럼 두 마리의 학이 대사를 호위하듯 날개를 움츠리고 지키고 있었다. 19번 사찰부터 시작한 기도를 했다. 사찰 하나마다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면 69개의 사찰이 남았으니 적어도 69명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리라.
납경소로 가니 눈에 익은 차림새의 남자가 앞에서 납경을 받고 있었다. 수다 삼매경에 빠져 18번을 거꾸로 가고 있을 때, 그쪽이 아니라고 가르쳐준 이였다. 카쿠린지까지의 여정을 마치고 기무라상과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자”는 인사로 아쉬운 작별을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남녀 욕탕 사용 시간이 적혀 있었다. 짐 정리를 해놓고 여자 사용 시간이 돼 욕탕으로 가는데 누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카쿠린지에서 다시 만난 그 남자였다. 삿갓을 벗고 보니 주름은 별로 없어도 호호 할아버지였다. 토야마에서 왔다는 하시모토 타다히고상이었다.
다음 날 다른 순례객들보다 좀 일찍 나서는데, 하시모토상이 버스 정류장에 먼저 와 있었다. 전날 밤 길 공부를 하면서 버스를 타고 절 근처까지 간 다음 로프웨이(리프트의 한 종류)를 타고 올라가 21번 다이류지(太龍寺)를 참배하고 23번 야쿠오지(藥王寺)까지 순례를 마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야쿠오지 근처 기요미 여관을 예약해뒀다. 하시모토상의 계획도 나와 같았고 숙소도 기요미 여관이었다. 자연스럽게 하시모토상과 일행이 됐다.
함께 길을 가면서 하시모토상은 중학교 미술 선생으로 정년퇴직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순례를 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부인과 함께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고 했다. “부인은 지금 어디 있냐” 궁금해하니 지금 자신과 함께 있다며 즈타부쿠로(순례자용 가방) 속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지난해 어느 날 가족 식사 모임에서 소화가 안된다고 음식을 잘 못 먹길래 다음 날 병원에 갔더니 췌장암이었다고. 72세 하시모토상은 지키지 못한 부인과의 약속들이 아직도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정년퇴직한 지도 오래됐건만 퇴직 후 서예를 가르치고 개인 창작 활동으로 바빠서 부인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한다. 언제까지고 아내가 기다려줄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모르겠다고 자책했다.
누군들 때늦은 후회가 없으리. 하시모토상의 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순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함께 걷는다는 말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는 아직 부인과 이별하지 못한 것 같았다. 21번을 마치고 다시 로프웨이로 하산해 22번 뵤도지로 가기 위해 역으로 걸어가는데 하시모토상이 “체상! (일본 사람들은 최 같은 복모음을 잘 발음하지 못해 나를 체상이라 불렀다.) 체상은 아직 젊으니까 지금 생각한 일은 지금 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니 체상이 행복하면 된다”고도 했다.
그 질문에 이 상황까지 오기 전 힘들었던 지나간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이 순례를 끝마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역이 가까워지자 한 노파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역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마 기차를 타고 가서 장을 봐 오는 길인 듯싶었다. 노파는 마치 아는 사람한테 그러듯 손짓으로 하시모토상과 나를 멈춰 세우더니 장바구니에서 바나나 두 개를 꺼내 하나씩 줬다. 노파의 행동이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하시모토상과 나도 고맙게 받아 들고 역사에 앉아서 맛있게 먹었다.
야쿠오지에 도착해 참배를 마치고 기요미 여관을 찾아갔다. 주인 기요미상은 하이톤의 목소리를 갖고 있어 듣는 사람도 저절로 텐션이 올라갔다. 그날 기요미상이 차려준 시코쿠의 가정식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맥주까지 곁들이며 하시모토상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다자이 오사무와 나쓰메 소세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읽었다는 나를 반가워하면서도 놀라워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는 한일 갈등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국가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양보가 어렵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개인과 개인은 양보와 이해가 생각보다 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간 교류의 문은 항상 열어둬야 한일 간 갈등도 해결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에 나도 동의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한일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위안부 문제로 한일관계가 이렇게까지 악화될 줄은 몰랐지만 민간 교류는 계속돼야 한다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있는 것을 보면 하시모토상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이다.
하시모토상은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갔다가 시간이 나면 다시 올 것이라고 했다. 기요미 여관은 친절하고 음식도 훌륭했지만 난방이 안 되는 다다미방은 정말 추웠다. 3월 말인데도 이불 속으로 냉기가 파고들어 밤새 떨면서 잠을 설쳤다. 그 탓이었을까. 다음 날, 늦잠을 잤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역으로 뛰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쳐버렸다. 어그러진 일정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시간 맞춰 도쿠시마행 기차를 타러 온 하시모토상과 만나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몇 개월 뒤 하시모토상의 편지를 받았다. 부인의 사진을 안고 부인이 제일 가고 싶어 했다는 스위스에서 찍은 사진도 함께. 하시모토상의 서예 전시회 초청장도 받았지만 가지는 못했다. 가끔 ‘하시모토상은 죽은 부인과 함께 남은 시코쿠 88 사찰 순례를 다 마쳤을까, 그리고 이제는 부인과 완전히 이별했을까’ 궁금하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6호 (2021.02.17~2021.02.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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