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가 된 조조의 헌제 옹립
195년 새해가 되면서 연주(허난성 동부)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여포와 첫 싸움에서 패한 조조는 194년 10월부터 195년 봄 사이 겨우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휴전으로 군량을 축적했고 여포가 동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다소 여유가 생겼다. 조조는 여포의 이동으로 비어 있는 남쪽으로 진군해 제음을 공격했다. 하지만 제음태수 ‘오자’의 저항은 만만찮았다. 조조군에 끝까지 대항했고 그사이 여포가 구원하러 왔다. 조조에게는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 때마다 강한 조조의 근성
조조는 왜 제음 공략에 성공하지 못했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제음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않고 여포를 기다리는 전략으로 보는 관점이다. 여포는 먼 동남쪽 산양까지 이동해 있었다. 제음을 구원하려면 신속하게 이동해야 한다. 그럼 군사들의 피로감이 높아진다.
두 번째는 당시 조조군이 제음을 쉽게 공략할 만큼 강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필자는 전자에 가깝다고 본다.
194년만 해도 야전에서 조조군은 여포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전쟁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장소로 적을 끌어들이면 유리하게 싸울 수 있다.
여포는 본인이 동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조조에게 제음-승지로 이어지는 공간을 헌납한 것을 후회했다. 부장인 설란과 이봉의 별동대를 거야로 급히 파견했다. 이 전략 역시 오류가 있었다. 조조가 제음을 공격할 때 조조 본거지인 범현이나 견성을 공격했다면 오히려 더 성과가 있었을 테다.
조조는 여포의 움직임에 바로 대응했다. 신속하게 거야로 이동해 설란을 공격했다. 여포는 이번에도 설란을 구원하려고 달려왔다. 그러나 여포가 도착하기 전에 조조는 설란을 죽이고 승리한다. 여포는 다시 후퇴했다.
이때 여포의 참모 진궁은 다른 곳에서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1만명에 가까운 군대를 모은 진궁. 194년 소수 정예로 군을 개편한 조조의 원정군보다 많았다. 195년 여름이 되자, 여포는 진궁과 합세해 다시 조조에게 도전했다. 지금까지 전황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일단 병력 규모나 전투 능력은 확실히 여포군이 앞섰다. 하지만 매번 진군 타이밍을 놓치거나 전력이 분산되면서 여포군은 조조군에게 끌려다녔다. 손자병법 마니아였던 조조는 확실히 전쟁의 주도권을 쥐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조조는 적은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매복과 기습 작전을 주로 썼다. 구체적인 전술은 기록된 바가 없지만, 조조와 여포의 전투에서 조조가 병력 수와 질 모두 열세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조조는 여포의 군대 상당수가 새로 모집한 병력임을 간파하고 이를 적극 노렸다.
조조의 지긋지긋한 기습 작전에 조금씩 무너진 여포군은 결국 더 이상 승리 가능성이 없음을 깨달았다. 여포는 자신이 이끌고 있던 정예군만 이끌고 야밤에 도주해 서주의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전쟁에서 지휘관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전투였다.
▶사방이 적이었지만
▷순식간에 중원을 평정한 조조
조조는 여포를 몰아낸 즉시 군대를 돌려 제음을 점령하고 주변 군현을 평정했다. 이것이 제음 포위전이 여포를 끌어들이기 위한 계략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다.
195년 상반기가 지날 무렵 조조 세력권은 순식간에 확대된 반면 여포는 중원의 동쪽 서주로 쫓겨났다.
드라마 같은 역전이 벌어지는 동안 서쪽에 있는 장막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조조와 여포 모두가 패하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던 것일까.
삼국지 100년 역사를 보면 ‘어부지리’는 없다. 먼저 움직이는 자, 링 위에 올라 적극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자, 더 용기 있고 과감하게 움직이는 자가 결국 승자가 됐다.
195년 8월이 되자 조조는 옹구를 포위하고 무섭게 공격했다. 장막은 장초를 구원하지 못했다. 장초의 저항은 볼 만했다. 약 4개월간 저항한 끝에 12월 옹구가 함락됐다. 장초는 자살했고 자신을 배신한 이들 형제에 분노한 조조는 장초의 삼족을 몰살했다. 동생이 죽어가는 동안 구경만 하던 장막은 원술에게로 도주하려다 중간에 부하에게 살해됐다. 조조는 즉시 군대를 동남쪽으로 진군시켜 연주 동남쪽 무평까지 도달했다. 이로써 조조는 연주를 완전히 평정한다.
마치 영화 같은 분투로 연주를 점령했지만 조조는 만족하지 않았다. 사실 만족할 수 없는 구조다. 연주는 지정학적으로 사방이 강적에게 포위돼 있다. 북쪽에 원소, 서쪽에는 이각, 곽사 등 동탁의 잔당이 자리 잡았다. 남쪽에는 유표와 손책, 동남에는 원술, 동쪽에는 유비가 있다. 조조는 연주를 평정했지만 더 큰 적과 국경을 마주해야 했다. 사실상 6 대 1의 싸움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6곳 중 일부와 동맹을 맺는다. 동맹군을 이용해 적을 견제하면서 생존하는 방식이다. 조조의 참모인 순욱과 정욱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6:1의 싸움을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6:1의 싸움을 벌여야 할 때라고 조조를 설득한다.
때마침 기회가 왔다. 조조가 옹구를 포위하는 동안 한나라 황제인 헌제가 한섬과 양봉 등의 도움을 받아 장안을 탈출했다. 동탁 잔존 세력이었던 이각과 곽사는 헌제를 급히 추격한다. 헌제는 아슬아슬하게 추격을 피해 고대 은나라 도읍지 안읍현으로 들어간다. 순욱과 정욱은 군을 파견해 헌제를 구하고 황제를 끼고 연주를 수도의 땅으로 만들자고 권한다. 조조의 다른 부하 장수들은 ‘무모한 행동’이라고 걱정했다. 자칫 황제를 끌어들이면 여섯 세력이 진짜 조조를 향해 칼을 겨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조는 순욱과 정욱의 의견을 따랐다.
196년 1월 조조는 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기병 대장 ‘조홍’을 파견한다. 하지만 조홍은 동승의 군대와 원술이 보낸 원병에 막혀 천자 구출에 실패한다. 하지만 조조는 뽑은 칼을 거두지 않았다.
조조는 원술을 공격해 여남을 확보하고, 별동대를 파견해 집요하게 헌제를 찾았다. 헌제를 옹위하는 양봉 등은 모두 동탁의 잔당이다. 전략도 없고 단결이 되지 않았다. 여름에 그들은 폐허가 된 뤄양으로 들어갔지만 먹을 게 없었다. 배가 고프니 이들 세력은 더 크게 분열했다. 헌제에게 끼니를 바치지 못할 정도로 곤궁했다.
조조는 거의 저항 없이 뤄양으로 달려갔다. 헌제 또한 조조밖에 기댈 세력이 없었다. 조조군이 다가오자 한섬과 양봉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조조는 헌제 옹립이라는 한 번의 선택으로 별다른 큰 전투 없이 삼국지의 진짜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6호 (2021.02.17~2021.02.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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