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황제의 사냥.. '호렵도 팔폭병풍'에 담긴 정조의 북학 의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 경매서 낙찰
"청 문물 수용·경계했던 정조 시대 반영"
하얀 갈기 말 위에 푸른 옷을 입은 청 황제(추정)가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화살통을 등에 맨 가신 일부는 호랑이 가죽으로 덧옷을 입었다. 조총을 겨누거나 활을 금방 쏠 태세의 인물도 보인다. 특유의 단추가 돋보이는 모자와 휘날리는 의장기로 볼 때 배경은 17~18세기 청나라. 스산한 가을 산야에서 호랑이와 사슴 등을 사냥하는 장면이다.
이 같은 그림을 수렵도 가운데서도 특히 호렵도(胡獵圖)라 부른다. 오랑캐(胡)가 사냥하는(獵) 그림이란 뜻이다. 한족인 명나라를 추종했던 조선은 만주족인 청을 오랑캐로 낮춰 봤다. 청나라가 일으킨 전쟁도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1637)처럼 호란(胡亂)이라 불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청의 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그들 문화에 관심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호렵도 제작 붐이 일었다. 현재 국내엔 30여점 전해진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이 지난해 9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들여온 ‘호렵도 팔폭병풍’이 18일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서화실에서 공개됐다. 비단 바탕에 병풍 8폭을 하나의 화폭으로 사용한 채색화다. 병풍 전체 크기는 가로 385.0㎝, 세로 154.7㎝이며, 그림은 한 폭당 가로 44.3㎝, 세로 96.7㎝다. 김동영 관장은 “웅장한 산수 및 정교한 인물 표현 등이 수준 높은 궁중화풍을 보여주고 보존 상태도 뛰어나다”고 환수 의의를 설명했다. 재단 측에 따르면 이 병풍은 1952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캐슬린 제이 크레인 박사가 소장했다가 개인소장자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언제 어떻게 미국으로 반출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국내에서 호렵도가 처음 제작된 때는 정조(1752-1800) 시대다. 병자호란이 끝나고도 100여년 이상 청과 관계가 소원했던 조선은 18세기 후반 들어 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자는 북학(北學)이 발달했는데 대표적 인물이 박지원·홍대용·박제가 등이다. 특히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1735∼1795)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단에 끼어 중국 연행을 하고 온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청 황제는 여름이면 열하(熱河·현재 허베이 성 청더 시)의 피서산장(避暑山庄)에서 더위를 피했고 가을에는 인근의 목란위장(木蘭圍場)에서 사냥을 했다. 박지원이 이때 연행 경험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펴낼 무렵 청 황제의 수렵 장면을 그린 그림도 국내에 유입됐는데 이게 우리 식으로 발전한 게 호렵도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호렵도는 청나라에 대해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그들의 전술을 파악하려 한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그림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그림 속 황제의 행렬만큼이나 마상무예 등 현실 군사력이 뚜렷이 묘사된 게 이 같은 이유에서다. 조선의 문과 무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려 한 정조는 청 문물을 수용하되 문의 측면에선 책거리(책가도)를, 무의 측면에선 호렵도를 장려했다. 호렵도를 처음 그린 화가도 당대 최고 화원이었던 김홍도(1745-1806?)로 알려진다. 다만 김홍도의 작품은 『임원경제지』에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실물로 전해지는 건 없다. 정 교수는 “이번에 환수된 호렵도는 산수 표현이 김홍도 화풍과 매우 닮아 그 영향을 받은 18세기 후반 혹은 19세기 초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병풍은 산수 표현과 황실 행렬에 이어 실제 사냥 장면이 묘사돼 공간과 함께 시간적 전개를 보여준다. 1∼2폭에는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와 폭포가 쏟아지는 스산한 가을 풍경이 보인다. 3폭에는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이, 4폭에는 나발과 피리를 부는 이들이 등장한다. 5∼6폭엔 청 황제와 수행원, 다양한 자세의 기마 인물들을, 7∼8폭에는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창을 휘두르는 사냥꾼들을 배치했다.
정 교수는 “호렵도는 처음엔 궁중에서 그려졌지만 차츰 민간으로 퍼져갔고 쓰임도 전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민화풍으로 발전한 호렵도에선 만주족의 호방한 기질이 잡귀를 쫓는 액막이로 여겨지거나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상(吉祥)의 용도로도 쓰였다고 한다. 민화 호렵도에선 사냥꾼들이 말 대신 기린, 해태, 백호, 코끼리 같은 걸 타기도 한다. 문화재청 김현정 학예연구관은 “이번에 환수된 호렵도는 궁중화풍의 높은 예술성을 보여줘 그동안 민화 중심이었던 호렵도 연구에 새로운 활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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