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프레임' 갇힌 文정부에..바이든 "한·일 관계부터 풀라"
4년간 누적된 한-일 불신·갈등
진전 없는 '과거사', 법원 판결로 악화일로
'트럼피즘' 누린 文, 반작용 본격화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하기 위한 과정에서 한ㆍ일 관계가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성공하려면 한ㆍ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15일 정의용 장관 임명장 수여식)는 원칙을 제시했지만, 미국은 한ㆍ일관계 개선을 사실상 동맹 강화의 전제조건처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18일 “바이든 행정부도 한ㆍ미 동맹 강화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 전에 먼저 한국이 일본과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보는 분위기가 강하다”며 “한ㆍ일 갈등은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 기제인 한ㆍ미ㆍ일 안보 공조를 크게 저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우선순위가 되면서 미국에겐 한ㆍ미 간 양자동맹 만큼이나 한ㆍ미ㆍ일 3각 협력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소식통도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만 정상화하면, 다른 한ㆍ미 간 현안들은 큰 문제 없이 갈 수 있다는 기류마저 미 측에선 감지된다”고 귀띔했다.
문제는 문 정부 출범 이후 약 4년간 차곡차곡 쌓인 양국 간 악재다. 일본은 역사 문제에 수출 규제로 보복하며 정경분리 원칙마저 깨버렸고, 한국은 상황을 관리하기보다 국내의 반일 정서를 부추기며 양국 관계는 추락을 거듭했다. 특히 과거사 문제로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정부가 취해온 강경 기조 때문에 개선을 위한 첫발을 떼기조차 쉽지 않다. 과거에는 옳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오히려 정부의 선택지를 제약하는 문 정부의 자승자박 3대 포인트를 꼽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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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으론 회복 힘든 ‘신뢰 적자’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ㆍ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내용을 담은 2015년 한ㆍ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문 정부는 “정부 간 공식 합의이므로 재협상을 요구하진 않겠다”(2018년 1월 강경화 외교부 장관)면서도 핵심 요소는 모두 제거하는 식으로 사실상 합의를 무력화했다. 당시 강 장관은 “합의는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해 최종적 해결이란 합의 내용을 부정했다. 일본 정부의 예산 10억엔(당시 약 108억원)으로 세운 화해ㆍ치유재단도 해산했다.
하지만 최근 기류가 급변했다. 외교부는 갑자기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1월 8일 일본 정부의 위안부 피해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 판결 직후)더니 문 대통령은 “2015년 합의는 공식 합의였다. (판결이)곤혹스럽다”(1월 18일 신년 기자회견)고 말했다.
이처럼 문 대통령까지 나섰는데도 일본 측에선 저의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사실 2015년 합의가 협정은 아니었지만, 국제적으로 ‘인증’받은 약속이었다. 내외신 기자 수백명 앞에서 한ㆍ일 외교장관이 함께 발표했고, 순차적으로 미국이 환영하고 유엔은 평가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정부가 바뀌었다고, 그것도 민ㆍ관 태스크포스(TF) 검증이라는 전례 없는 형식으로 이를 무효화한 것이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부에 따라 양국 간 합의를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다는 불신을 해소하려면 한국 정부가 먼저 제스쳐를 취해야 한다”며 “배상 문제 등 법적 영역이나 민간 영역 차원의 일도 정부가 나서 해결할 용의가 있다고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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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이 된 ‘피해자 중심주의’
문 정부가 꼽은 한ㆍ일 위안부 합의의 가장 중대한 하자는 '피해자 중심주의 위배'였다. 정작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는 한국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제약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8월만 하더라도 “문제 해결의 중요한 원칙은 피해자 중심주의이며, 정부는 할머니들이 괜찮다고 하실 때까지 해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이 말대로 하려면 지난달 법원의 배상 판결에 따라 한국 내 일본 정부 자산을 현금화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사법 정의를 완성해야 한다. 또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하자는 이용수 할머니의 요구도 수용해야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구현하려면 한ㆍ일 관계 악화를 감수해야 하고, 일본과 관계를 풀려면 피해자 중심주의를 지키기 힘든 자기 모순적 상황에 빠진 셈이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은 “정부는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고 중재하는 것으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원칙을 실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거시적 관점에서 국익과 외교 환경 등에 대한 여러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도 동시에 피해자에게 설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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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피즘’ 호시절의 반작용
외부 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한ㆍ일 관계에 큰 관심을 갖거나 관여하지 않았다. 2019년 한국이 한ㆍ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을 중단하겠다고 한 뒤에야 개입했을 정도다. 일본과 강대강 대치를 택한 문 정부가 반일 감정을 사실상 국내정치적으로 이용해온 것도 이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철학은 ‘미국의 힘은 동맹으로부터 나온다’는 정통파에 가깝다. 실제 국무부 관계자는 “한ㆍ일 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협력 심화의 기회를 모색할 것”(12일 VOA 논평)이라며 방관은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한국으로선 일본에 손을 내미는 동시에 미국을 향해서도 ‘한국은 약속을 깨는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려는 일본의 논리를 방어해야 하는 숙제를 동시에 받아들게 됐다. 다만 미국의 중재 의지를 한ㆍ일 관계 개선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의 적극적 중재만큼 강한 추동력은 없다”며 “이를 계기로 대화의 단초가 마련되는 분위기인 만큼 우리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서 진일보한 제안을 하는 등 전향적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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