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내몬 업무 스트레스 '일의 타살' [이슈&탐사]
하루에 적어도 한 명이 ‘일·노동’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2020년 자살예방 백서’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직장 또는 업무상 문제로 인한 자살’이 487건이다. 사흘에 네 명꼴이다. 같은 해 발생한 살인 건수(309건)보다 170여건 많다.
하지만 자살이 업무 탓이라며 산업재해 피해 보상을 신청하는 경우는 연 60~70건이다. 원칙적으로 자살은 고의·자해행위여서 업무상 재해가 아니다. 다만 일이 원인이 돼 ‘정상적인 인식 능력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는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 자살을 정신질환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업무상 자살이 산재인지는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이 판단한다.
한 공기업에서 사무영업직으로 22년7개월간 일했던 윤정훈(가명)씨. 그는 2018년 1월 유서 두 통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그가 지방에서 본사로 발령받아 일하면서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며 산재 신청을 했다. 윤씨는 전출과 휴직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망 직전에는 자신의 실수로 직원들 성과급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 스트레스 탓에 정상적인 인식 능력이 저하된 상태였다”며 산재를 승인했다. 유족은 산재 피해자에게 주는 급여를 받게 됐다. 무엇보다 고인의 죽음이 나약함에서 비롯된 게 아닌 ‘일의 타살’이라는 점을 인정받게 됐다.
국민일보 취재팀은 윤씨와 같은 직장인의 극단적 선택이 어떤 경로로 이뤄지는지 자세하게 파악하기 위해 2018년부터 2020년 4월까지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의 자살 관련 질병판정서 142건을 전수 분석했다. 산재로 승인된 경우는 95건이고 47건은 ‘불승인’이다. 업무상질병판정서는 일종의 ‘산업재해 판결문’이다. 재해 당사자나 유족의 산재신청 사유와 내용, 진료기록 및 의학적 소견, 신청인과 사업주의 주장 및 이견, 인정사실, 질판위의 판단(다수의견, 소수의견) 등 업무 환경 전반을 담고 있다. 취재팀이 분석한 판정서 142건은 모두 1601쪽 분량이다. 자료는 한정애 환경부 장관이 취임하기 전 그의 의원실을 통해 입수했다.
분석 결과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들은 평균 약 3개(2.95개)의 업무 스트레스 요인이 단기간 집중적으로 중첩되면서 자살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산재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평균 3.4개의 업무 스트레스를 경험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정신질환의 업무 관련성을 조사하면서 ‘스트레스 요인’을 10가지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업무 스트레스로 볼 수 있는 건 ‘업무의 양·질 변화’ ‘업무의 실수·책임’ ‘배치전환’ ‘업무 부적응’ 네 가지다.
산재를 신청한 142명 중 '업무의 양·질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81명(57.0%·이하 중복 집계), '업무 실수 및 책임'은 60명(42.3%), '배치전환' 50명(35.2%), '업무 부적응' 40명(28.2%)이었다. 갈등 스트레스 요인도 여러 사례에서 발견됐다. 갈등 스트레스로 분류되는 '상사·동료·부하 등과의 직장 내 갈등'을 경험한 사람은 57명(40.1%)이었고 '폭언·폭력·성희롱'은 23명(16.2%), '지속적 집단괴롭힘' 15명(10.6%)이었다. 그밖의 스트레스 요인으로 '회사와의 갈등'(해고, 징계, 퇴직종용, 재계약 불안 등) 등이 있는데 36명(25.4%)이 이를 겪었다.
즉 직장인의 자살은 흔히 떠올리는 직장 내 괴롭힘이나 상사의 갑질, 사용자의 노동자 탄압 등으로 인한 예외적 사건이 아니었다. 업무 환경의 급변, 업무량과 질의 악화, 과도한 책임감에 비해 줄어든 권한 등 여러 요인이 중첩되면서 노동자를 짓누를 때 누구든 피해자가 됐다.
대기업 과장인 이모(사망 당시 39세)씨는 업무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이씨는 연구직으로 입사했지만 3년 후 원치 않는 현장 관리직에 배치됐다. 직을 옮기면서 현장 근무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을 겪었다. 상사에게서 '공부를 그렇게 했는데 왜 이것밖에 못하느냐'는 질책을 자주 들었다. 이런 가운데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다. 회사는 구조조정과 희망퇴직을 공지하고 이씨를 첫 면담 대상자로 선정했다. 그는 상사에게 '죄송합니다. 오늘은 출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 한계인 것 같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낸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취재팀 분석에선 업무로 인한 자살이 한 번의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기보다 일정한 경로를 따라간다는 사실도 발견됐다. 직무변화→업무부담→상사/동료관계(갈등)→사망으로 이어지는 경로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던 이태섭(가명)씨도 부서 이동과 과중한 업무, 동료와의 갈등을 차례로 겪은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는 2018년 12월 부서 이동으로 기관 청렴도 관련 업무를 맡았다. 기관 청렴도 평가가 하락해 이 업무에 사내 주목이 높았던 때였다. 이씨는 기한이 정해진 '청렴 종합대책' 수립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밤샘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청렴 종합대책의 주된 내용이던 '시내 교통비 폐지' 문제로 노조와 동료 조합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중압감과 부담감이 이씨를 짓눌렀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에서 자신을 질책하고 회사가 번창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스트레스가 될 큰 사건을 겪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다시 좌절과 불안을 느끼게 되고, 이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승진은 직장인이 능력과 노력을 인정받은 결과다. 그렇지만 질병판정서 142건 가운데는 승진한 뒤 목숨을 끊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업무의 양과 질이 급격히 달라지면서 심리적 압박이 커진 탓이다.
대기업에 다니던 김민우(가명)씨는 책임연구원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승진한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내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2015년 말 미래 핵심 사업 부문에 배치됐다. 업무량이 늘었음은 물론 심적 부담감이 커졌다. 승진 후에는 연구·개발뿐 아니라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리더 역할까지 수행해야 했다. 새로운 업무가 추가되고 회의에서 질책·공격을 받으면서 스트레스가 극심해져 스스로 생을 마쳤다.
김인아 교수는 자살 노동자들은 대개 회사에서 평가가 아주 좋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고 남들에게 싫은 소리 못 하고 일을 껴안고 하는 스타일"이라며 "일을 큰 문제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니 회사에서는 중요한 일을 맡긴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일이 잘 안 될 수도 있고, 그게 노동자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민감하게 캐치해서 조정해줘야 한다. 잘한다고 일을 계속 주고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말했다.
승진을 했지만 책임만 과하게 주어졌을 뿐 권한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도 있었다. 반도체 생산장비 제조 업체에서 근무하던 손원경(가명)씨는 2006년 입사 이후 엔지니어링 업무만 수행해오다 2018년 법인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법인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인적·물적 뒷받침 없이 과중한 업무가 지속되면서 야간·주말 근무가 지속됐다. 주변 사람들에게 ‘딸이 너무나 보고 싶다’ ‘얼굴을 까먹고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했다. 해외 법인의 자금난이 심해 직원들 월급과 숙소 임대료, 출장 경비를 지급하지 못하자 사비로 이를 충당했다. 그는 승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우울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한편 업무상 질병판정서에 기록된 사망자 142명 중 57명은 ‘직장 내 갈등’을 겪은 것으로 분석됐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이 노동자의 자살 관련 가장 주목받는 부분이지만 그 기저에는 ‘업무 요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인아 교수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하면 직관적이고 호소력이 있어 자주 거론되지만 ‘직장 내 갈등’ 자체가 업무 난도가 높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주어졌을 때 뭔가 해보려다 실패하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상사와의 지속적 갈등을 빚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차지훈(가명)씨도 갈등의 배경에 업무 요인이 있었다. 반도체 장비 영업팀장이던 그는 만성적인 과로 상태였다. 상사가 보고서나 견적서를 반려하면 재작성하며 밤샘 작업을 했다. 회사 측도 “담당 업무가 영업직이라 매출 등 실적 압박 등 요인이 발생할 수 있었고 업무상 고객 또는 직장상사로부터 욕설 및 고함 등 폭언을 들었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산재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인력 충원이나 업무의 효율적인 조정을 제안한다. 한 직업환경 전문의는 “‘서로 욕하지 말고 대화는 이렇게 해’라고 하면 근본적 문제인 업무 분장, 부족한 인력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아 직장 내 갈등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자살 관련 질병판정서 142건 분석 결과 남성 124명, 여성 18명으로 남성이 7배 많았다. 2018년 전체 자살자 수 통계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2.6배 높은 것과 비교하면 남성이 유독 업무 문제로 더 많이 자살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직급은 중간관리자(과장·차장·부장) 이상이 74명으로 가장 많았고, 직원(사원·주임·대리)이 60명이었다. 임원급(이사·대표)도 7명이었고, 인턴이 1명 있었다. 중간관리자 74명 중 부장급 이상이 35명으로 절반 정도였다. 한편 중간관리자 이상 81건 중 여성은 2명에 불과했다.
요약하면 ‘중간관리자 이상의 남성 노동자’가 정신질환 자살 산재의 상당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남성들이 회사의 주요 위치에 자리하고 과도한 업무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다만 취재팀이 분석한 질병판정서 142건은 모든 업무상 자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산재로 인정해 달라며 신청된 서류다. 실재하는 현상에 비해 남성의 업무상 자살이 더 많은 것처럼 왜곡 표현될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여성의 산재 신청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고 본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주 수입원이 남성 가장이 갑자기 상실될 경우 가족 입장에서는 절박함이 커 산재 신청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며 “반면 여성은 보조 노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아 산재보상 판정 요구가 적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산재 제도 자체가 ‘안정적인 정규직 임금근로자’ 중심으로 짜였다는 점도 지적한다. 비정규 서비스직 종사 여성의 경우 산재 신청 자체가 적어 여성 노동자의 자살이 과소평가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인아 교수는 “40, 50대 여성이 많은 요양보호소나 식당 등 서비스 업종에서 업무상 스트레스가 있다고 해도 경찰 등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냥 자기들끼리 개인적으로 싸운 것처럼 간주된다”고 말했다.
자살 노동자들이 해당 직장에서 근무한 기간은 평균 9년11개월이었다. 10년 이상 근무자는 58명이었고, 그중 20년 이상은 22명이었다. 4년 미만은 52명이었고 2년 미만 초단기 근무자도 32명이 있었다.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했더라도 ‘멘탈’(정신건강 상태)이 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이 단기간에 겹치면 누구라도 극심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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