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옛 관아는 이렇게 생겼답니다

2021. 2. 18.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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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진 관아
지방 관아도 일부 객사와 동헌뿐
하석 한필교의 '숙천제아도' 증언
인간적 체취가 넘치는 한옥의 미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국내 답사 중에는 별로 느끼지 못하다가도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크게 아쉬움이 생기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유럽의 도시들은 한결같이 오래된 옛 시청 청사를 중심으로 발전해 역사의 향기가 일어나고 있건만 우리나라 도시엔 조선시대 관아가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려 327 군현에 달하던 지방 도시에서 옛 관아라고는 몇몇 현청의 객사와 동헌 건물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제주, 나주, 김제, 홍산, 무장, 거제 등 여섯 고을 관아 터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고 토지 매입과 건물 복원을 시행해 가고 있다. 그러나 수도 한양에 있었던 그 많던 관아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광화문 앞에 육조(六曹)거리가 있었다는 말만 들었지 육조 건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전통 사회에서 근대 도시로 이행하는 과정에 목조건물이 겪은 숙명이었고, 원흉은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하면서 모두 파괴하여 버린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카메라가 보급되기 이전이어서 사진으로 전하는 것도 없고 옛 문헌의 삽도만 있을 뿐이다.

그런 중 조선후기 문신인 하석(霞石) 한필교(韓弼敎,1807~1878년)가 자신이 평생 동안 근무했던 15곳의 관아를 전문화가에게 기록화로 그리게 하여 화첩으로 엮은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가 있어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다. ‘숙천제아도’란 ‘잠자고 지내며 근무한 여러 관아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 화첩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燕京)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근래에 책(2012년, 민속원)으로 발간되었고, 특별전(2015년, 리움 ‘한국 건축 예찬’)에 한차례 소개된 바 있다.

한필교의 ‘숙천제아도’에 실린 조선시대 호조 관아.

한필교는 1833년 진사에 합격한 뒤 70평생을 관료로 지냈는데 그는 34세 때인 1840년에 홀연히 자신이 근무한 관아들을 그림으로 남기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림은 사물을 그리는 것이니 천지간의 오묘함을 전하지 못할 것이 없다…. 나는 헌종3년(1837)에 처음 벼슬길에 올랐는데 한가한 날 화가에게 명하여 내가 그동안 거쳐 왔던 관아들을 한 폭씩 그리게 했다. 이후 역임하는 관아마다 그림을 그리게 하여 화첩으로 꾸미고 그 관아가 있던 위치와 내가 맡았던 직책을 써넣었다.”

이리하여 이 화첩에는 한양에 있는 관아 9곳, 지방 관아 6곳이 그려져 있다. 화첩에 실린 15폭의 그림은 모두가 뛰어난 기량과 조형적 성실성으로 한눈에 그 관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다. 화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화공(畵工)이라고만 하여 아쉽기만 한데 그중에는 같은 화가가 그린 듯 비슷한 화풍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도 기록화에도 능했던 도화서 화원들의 솜씨일 것으로 보인다.

‘숙천제아도’에 실려 있는 호조, 공조, 선혜청 등의 건물을 보면 관아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사람이 생활하는 인간적인 분위기가 따뜻하게 다가온다. 각 관아는 책임자인 당상관(정3품 이상)이 근무하는 당상대청(堂上大廳)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건물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마당이 여럿으로 분할되어 있고 서비스 공간이 풍부하다.

특히 관아마다 반듯이 네모난 연지에 정자가 곁들여 있어 생활의 여백이 느껴진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공자님 모신 사당은 없는데 오히려 토속신을 모신 신당(神堂)이 빠짐없이 들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어디를 보아도 오늘날의 ‘공무원 표’ 건물과는 전혀 다르고 주택과는 또 다른 한옥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중 말을 관장하는 부서인 사복시는 마구간이 있는 특이한 공간배치와 함께 말을 조련하는 모습까지 그려 있어 재미있게 보았다.

이를 보고 있자면 “아! 옛 관아가 이렇게 생겼구나!”라는 감동과 감회가 절로 일어난다. 이렇게 옛 관아의 모습을 생생한 기록화로 남겨준 한필교가 고맙고 존경스럽기만 한데 그는 이미 후대에 이 그림이 지닐 가치를 예견한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화첩은 붓과 먹으로 희롱한 것에 지나지 않아 특별한 용도로 쓰기에는 넉넉지 못하지만 대문과 담장, 건물 배치의 크고 밝은 모습, 관아 건물의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이 한 폭의 그림 속에 다 그려져 있다. 그곳에 가 보지 않고도 어느 관청, 어느 관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으니 그림이 아니라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후세인으로 하여금 옛 제도가 어떠한지 고찰하기에는 넉넉할 것이다. 아! 그림이란 참으로 (사회적) 기능이 적지 않구나…. 애오라지 후세에 전하는 보물이 될 만하지 않은가.”

본래 미술사에서 건축은 궁궐, 사찰, 관아, 학교, 주택 등으로 이어지건만 조선시대 건축사에서 관아 건축은 사실상 공백으로 되어 왔다. 그래서 지금 광화문 광장, 서울 정부종합청사 건너편에서 진행 중인 3정승이 근무하던 의정부(議政府) 관아 복원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이를 위한 발굴조사는 이미 끝나 건물의 위치들이 모두 확인되었다는데 모름지기 ‘숙천제아도’에 나오는 그런 품격과 한옥의 아름다움이 있는 관아의 복원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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