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안혜리 2021. 2. 18. 00:4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 "불신 크면 우선 접종"
공언과는 달리 4월 이후 접종키로
외국 지도자 솔선수범 부럽다
안혜리 논설위원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우우 그대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

기다림, 그리고 약속을 저버린 이에 대한 실망을 담은 이적의 슬픈 노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 문득 떠올랐다. 기다림과 실망, 어째 우리가 맞닥뜨린 코로나19 백신 얘기 같아서다. 손에 잡히는 희망은 백신뿐이지만 “남들보다 먼저 맞을 것”이라던 약속(문재인 대통령)이 무색하게 기다렸던 백신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벌써 절반 가까운 국민이 접종한 이스라엘을 비롯해 이웃 나라 일본 등 세계 88개국은 이미 백신 접종 속도전에 돌입했다. 선진국·개도국 가리지 않고 각국 정부와 지도자들이 국민을 위해 진작부터 다양한 백신을 선 구매한 덕이다. 반면 백신 확보는 게을리하고 K 방역 홍보에만 열을 올리던 문재인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늦은 오는 26일, 그것도 처음 약속과 사뭇 다르게 논란 많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75만명분만으로 찔끔 맛보기 접종을 겨우 시작하게 됐다.

어쩌면 이런 참사는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량이든 속도든 백신과 관련한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문 대통령은 투명하고 신속 정확한 정보 공개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확정되지도 않은 사실(“화이자부터 도입”)을 서둘러 발표하거나 심지어 부정확한 정보(“백신 생산국이라 먼저 맞는다”)로 국민들 눈 귀를 가려왔고, 그게 결국 ‘OECD 꼴찌’라는 참담한 성적표로 이어졌기에 하는 말이다. 백신에 관한한 문 대통령의 약속이 그대로 실현된 게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불거진 “우선 접종” 논란도 그중 하나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백신 불안감이 높아지면 제일 먼저 맞는 것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효능 높은 화이자나 모더나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접종 중단 사태를 빚는 등 다른 백신에 비해 여러 우려가 제기된 아스트라제네카 하나만으로 접종을 시작하는 상황이 되자 어찌 된 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국민 3분의 2가 “지켜본 후 맞겠다”고 할 정도로 백신을 둘러싼 불신이 커져만 가는데도 질병관리청을 앞세워 “문 대통령은 연령대(65세 이상)가 맞는 일정(4월 이후)에 따라 접종을 받게 될 것”이라고 슬그머니 흘렸다. 국민이 먼저 맞고 발생하는 문제를 한두 달 관찰한 후 대통령이 맞거나, 아니면 뒤늦게 들어오는 화이자·모더나 백신을 맞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이러니 불신이 가라앉을 턱이 없다.

이런 행보는 접종 독려를 위해 먼저 자기 팔을 걷어 올린 다른 국가 지도자들과 대조적이다. 인도네시아는 아스트라제네카·노바백스 1억 회분을 계약했지만 도입 일정상 호감도가 떨어지는 중국 백신으로 우선 고령자 접종에 나섰다. 조코위(60) 대통령은 “백신 안전성을 국민에게 보여주겠다”며 약속대로 가장 먼저 백신을 맞았다.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72) 총리도 국민 3분의 1이 접종을 꺼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국민 대상 접종 개시일 전날에 1호로 접종했다. 싱가포르의 리셴룽(68) 총리 등 각국 지도자들이 이런 솔선수범을 보인 덕분에 접종률은 올라가고 확진자는 급감하고 있다. 거꾸로 우리는 잠시 주춤했던 확진자 수가 다시 치솟으며 불안이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의 1호 접종 허언이 문제가 되는 건 백신의 신뢰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대통령부터 접종하라”는 복수의 청원이 올라왔겠는가.

다른 나라 지도자들이 보여줬듯이 불신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통령을 비롯해 당·정·청의 주요 인사들부터 백신을 먼저 맞는 것이다. 일부에서 백신 거부 분위기마저 감지되자 이런 쉬운 방법을 젖혀두고 문 대통령은 특유의 언론 탓, 국민 탓만 또 반복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 1일 수석 보좌관회의에선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와 허위사실 유포로 국민 불안을 부추기거나 백신 접종을 방해하는 일이 있다면 엄단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허위사실 유포로 따지면 청와대야말로 가장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공자는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고 소인은 혀로 말한다(君子以行言, 小人以舌言)”고 했다. 군자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응당 보여줄 법한 최소한의 솔선수범을 기대하는 것조차 무리인 걸까.

‘찬 바람에 길은 얼어붙고 나도 새하얗게 얼어버렸네.’ 이적이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노래에서 읊조린 것처럼 지금 한국엔 찬 바람이 불고, 하루라도 빨리 마스크를 벗어버리고픈 국민의 희망도 새하얗게 얼어버렸다.

안혜리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