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한국 영화를 망칠 수 있는 구원자

강혜란 2021. 2. 1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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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문화팀 부장

코로나19로 움츠러든 설 연휴 극장가에선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이 1위를 달렸다. 나흘간 27만명을 끌어 지난 1월20일 개봉 이래 160만 관객을 넘어섰다. 반면 한국 영화들은 지난 연말 이래 규모 있는 신작을 극장에 걸지 않고 있다. 올 1월1일부터 2월16일까지 관객 점유율이 10.9%로 미국(59.8%)은 물론 ‘귀멸의 칼날’을 내세운 일본(20.7%)에도 못 미친다. 지난해 ‘기생충’의 환희가 무색하다.

극장엔 가지 않아도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봤다. 넷플릭스로 공개된 ‘승리호’가 대표적이다. 몇 차례 개봉을 미뤘다가 지난 2월5일 190여 개국에 동시 공개돼 당일 시청 1위를 기록했다. 이렇듯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공개로 돌아선 한국영화는 지난해 ‘사냥의 시간’이 처음이고 ‘콜’과 ‘차인표’가 뒤를 이었다. 오는 4월엔 베니스영화제 초청작 ‘낙원의 밤’이 예정돼 있다.

코로나19로 극장 관객 수 급감했지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전 세계 2억명 구독자를 거느린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한국 영화가 널리 알려졌으니 반기는 목소리가 크다. 재고 영화가 쌓이고 신작 제작이 불투명한 영화사들도 구원의 동아줄을 기다린다. “넷플릭스 코리아 사무실이 있는 종각역부터 종로5가까지 기획안을 든 제작자들이 줄서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허기를 면하고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대가는 쓰다. 극장 개봉에 이어 단건 결제하는 IPTV, 구독결제하는 OTT로 이어지던 부가가치 경로를 통째 포기하는 행위라서다.

올해는 픽사·마블 등 막강 콘텐트를 거느린 디즈니의 OTT 플랫폼 디즈니플러스도 국내 진출한다. 안방에서 이들 입지가 강화될수록 극장 관객은 줄 것이다. 관객 감소는 향후 한국 영화 성장의 토양을 위협한다. 예컨대 티켓 값의 3%(1만원이라면 300원)를 떼 축적해온 영화발전기금은 지난해 거의 걷힌 게 없다. 관객이 4분의 1로 쪼그라든 데다 기금 납부액마저 90% 감면해줬기 때문이다. 이 시드 머니를 통해 영화진흥위원회가 벌여온 각종 신인 감독·작가 육성과 독립영화 지원사업도 축소가 불가피하다. 제2의 봉준호를 길러낼 요람의 위기다.

박찬욱의 영화 ‘아가씨’의 유명한 대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를 빗대 생각해본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들이 한국 영화를 망치러 온 거야 아니겠지만, 그들의 구원에 길들여진다면 한국영화 생태계가 망가질 수 있다. 과감하게 글로벌 OTT에다 영화발전기금에 준하는 책무를 지우는 방안도 생각해야 한다. 다음 주 열리는 영진위 포스트 코로나 정책추진단의 정책과제 포럼에서 발전적인 토론이 있길 기대한다.

강혜란 문화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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