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미국에 한국은 무엇인가
소련 핵무장, 중국 공산화가 봉쇄정책 강화시켜
중국 부상, 북핵 개발로 주한미군 중요성 더 커져
한국도 한미동맹을 국가이익 관점에서 대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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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에 대한 올바른 이해
1953년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중단되는 시점에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중립화하는 방안을 꺼내들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경우에서 보듯 주변 강국의 합의없이 중립국 선언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적대감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한반도를 중립화한다는 것은 결코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었다.
당시 미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 회의록을 보면 한반도 중립화 방안이 제기되자마자 미국의 합동참모본부가 바로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스위스와 스웨덴을 예로 들면서 중립화가 되더라도 한국이 자체 무장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때 결정적 발언이 나왔다. CIA 탄생의 산파역이었고, 국무성 차관보였던 스미스 장군은 미국이 한국을 전략적 지역으로 고려한 적이 없었으며, 정전협정 후 한반도 중립화와 함께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미국의 잘못된 전략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발언이 미국 정부에서 보편적 입장이 아니라 개인 의견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미동맹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제기되었던 한반도 중립화 방안은 1953년 이후 더 이상 미국 정부의 공식문서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왜 이런 발언이 나왔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립화 정책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음에도 주한미군 감군와 철수에 관련된 논란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미관계와 관련하여 그동안 한국 사회가 던졌던 질문은 ‘한국에 미국은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한미관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더 중요한 질문은 ‘미국에 한국은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현대사에서 한미관계가 시작되는 카이로 선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카이로 선언은 1943년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첫 번째 국제적 약속이었으며, 열강에 의한 신탁통치라는 ‘적절한 절차’를 거친 후 독립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은 왜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했을까?
미국의 신탁통치안은 소련의 반대에 의해서 1945년 모스크바 3상협정에서 3항에서만 명시되었지만, 1947년 한국 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유엔으로 이관될 때까지 미국의 대한정책 중 가장 핵심이었다. 이는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미국 정부의 주요 문서에 신탁통치안은 핵심정책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38선 이남의 미군정의 설치 기간이 최소화될 것이라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미국이 1946년 반탁운동 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모스크바 3상결정을 지지하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탁통치안에서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서도 미국이 의도했던 것은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한반도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20여개의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해당 지역 사이에 중요도를 계산해야 했다. 왜냐하면 한정된 자원을 모든 지역에 골고루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7년에 제출된 미 합동참모본부의 문서에 보면 한국은 미국이 고려해야 하는 16개 지역 중 미국의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13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한국에 대한 비용을 최소화하고 더 중요한 지역에 미군과 원조를 더 배치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1945년 이전 필리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탁통치가 한국에 대한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앞으로 들어설 한국 정부가 어느 일방의 강대국에게 쏠리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은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배타적인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것이 결국 이 지역의 불안정을 가져왔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을 포함한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는 한반도의 상황을 안정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것으로 보았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1947년 이후 냉전적 대립이 심화되고, 한반도 내에서도 좌우 대립이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러시아·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일본의 이웃나라인 한국의 중요성을 고려했기 때문에 미군정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독일이나 일본에 비해 그 중요성이 떨어지기에 직접 점령보다는 신탁통치안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가 처했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논란이 되는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의 방위선(defense perimeter)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이 제외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미군을 파견했을까? 일부 수정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의 오판이었다.
1949년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대미문의 성공을 가져온 해였다. 우선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에 의한 핵 독점이 깨졌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기세는 1950년 북한이 남침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이는 전쟁 발발 3개월 전에 있었던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읽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성공은 미국의 봉쇄정책을 강화시켰다. 소련의 핵무기 보유는 미국의 재래식 무기 증강으로 이어졌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더 이상 팽창하지 못하도록 봉쇄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1950년 초에 이루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안보 딜레마의 결과였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설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만약 북한의 남침이 1949년 주한미군 철수 직후에 이루어졌다면, 과연 미국이 개입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능하도록 한다.
물론 미국은 혼자 들어오지 않았다. 유엔의 깃발 아래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러나 미국은 참전으로 인한 군사비용 증가를 막지는 못했다.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목했던 점이 바로 한국전쟁을 통해 과도하게 증가한 군사비였다. 한국에 대한 전면 개입은 미국의 능력치를 넘어선 것으로 판단했다. 군사비를 감축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있는 미군을 감축해야만 했다. 주한미군 감축 계획은 1961년 케네디 정부에서 ‘버거 플랜’, 1971년 닉슨 정부에서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로 이어졌다. 닉슨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 지상군의 완전한 철수를 계획했었고, 아버지와 아들 부시 행정부는 해외주둔 미군의 재편 과정에서 주한미군 감축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반환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 주둔비뿐만 아니라 해외주둔 미군의 훈련비용까지 부담할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미국의 정책이 1950년대와 현재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붕괴되었지만 중국의 부상, 북한의 핵 개발로 주한미군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이 1950년 체코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엔 안보리에 소련 대표를 참석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미국을 유럽이 아닌 한반도에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미국은 더 이상 한반도에 전력을 투구하지 않기 위하여 전면전을 막고자 했다, 이는 1953년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서 나타나는 일관적인 기조였다. 일본의 재무장을 위한 헌법 개정에 반대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국가이익 관점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이익을 우선하기에 미국에 섭섭한가? 아니다. 세계질서는 냉정하다. 한국도 철저하게 국가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한미동맹은 양국의 국가이익이 서로 일치할 때 계속될 수 있다. 한미관계가 시대에 맞게 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국에 한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동맹관계를 아전인수 격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양국 간의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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