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소민의 슬기로운 예술소비] 시대를 기록한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

데스크 2021. 2. 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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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루이 필리프 1세를 풍자한 그림으로, 세금 인상에 대한 반발심에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종이'는 국왕의 자신을 지지해준 부르주아에게 하사한 훈장을 의미한다, - 위키피디아 -민중의 벗이자 정치 만평가로 불리는 19세기 풍자만화의 선두주자인 오노레 도미에는 정치 변화에 민감히 앞장서 위트 있는 비판을 감행하며, 민중의 대변인으로서 시대의 고발자 역할을 뛰어나게 감당했던 그의 만화와 그림에는 그 어떠한 기록보다도 당시의 시대상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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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강 튀아’(Gargantua), 오노레 노미에 Honoré Daumie, 1831년, 석판화 lithographⓒ

국왕 루이 필리프 1세를 풍자한 그림으로, 세금 인상에 대한 반발심에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서 흉측하게 생긴 거인은 루이 필리프 1세를, 행색이 초라한 이들은 서민을 상징한다. 주목할 것은 의자 밑에서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뻗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부르주아 계층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종이’는 국왕의 자신을 지지해준 부르주아에게 하사한 훈장을 의미한다, - 위키피디아 -


민중의 벗이자 정치 만평가로 불리는 19세기 풍자만화의 선두주자인 오노레 도미에는 정치 변화에 민감히 앞장서 위트 있는 비판을 감행하며, 민중의 대변인으로서 시대의 고발자 역할을 뛰어나게 감당했던 그의 만화와 그림에는 그 어떠한 기록보다도 당시의 시대상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기차역 공간을 개조하여 독특한 공간과 동선으로 꾸며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은 1848년부터 1870년까지의 예술품이 주를 이루는 프랑스 파리의 3대 미술관중 하나이다.


낭만주의 시대를 종점으로 작품이 전시되는 루브르 박물관(고전미술)과 포비즘, 큐비즘 등의 초현실주의 이후의 작품 전시가 주인 조르쥬 퐁피두센터(현대미술)와의 교량 역할을 하는 오르세 미술관(근대미술)은 특히 가장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7년여 기간에 걸쳐서야 준공된 이곳은 외부전경은 전혀 손대지 않고 역청사 건물만을 개축하여 프랑스의 문화유산이라는 자긍심이 한층 더 부각되는 곳이다. 이러한 오로세 미술관의 메인 홀 0층의 좌측 첫 번째 방 한 칸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는 사실주의 화가가 바로 프랑스 ‘풍자 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노레 도미에이다.


미술이 주변의 풍경이나 작가 내면의 감성을 드러내는 수단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를 신랄하게 묘사하고 비판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오노레 도미에는 사실주의 대표 화가라는 역사적 명칭은 쿠르베에게 양보했고,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 자리는 빅토르 위고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그는 19세기 민중속의 화가로 당대의 ‘흔들림 없는 민중의 벗’이라 칭송받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풍자만화의 아버지’로 불렸다.


물론 도미에 이전에도 시사 풍자만화를 그렸던 작가들이 있다. 호가드나 길레이, 롤랜드슨 그리고 ‘나체의 마야’와 ‘착의의 마야’로 유명한 고야가 있었고, 19세기 프랑스에서 ‘라 카리카튀르’지와 ‘르 샤리바리’지를 창간했던 필리봉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오랫동안 초지일관 시사 풍자만화와 풍속 만화를 그렸던 이는 오노레 도미에뿐 이었고,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후배 만화가들이 점차 그를 본보기로 삼으며 ‘풍자만화의 아버지’ 자리를 굳혔다.


왜 민중은 도미에를 ‘민중의 눈이 되어 준’, 민중의 삶을 그린 ‘민중의 화가’ 라고 칭송했을까. 도미에의 풍자만화가 그 무엇보다도 강한 선동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문맹률이 높았던 19세기 당시의 민중들에게 그의 우스꽝스러운 풍자만화는 답답한 민중의 시야를 훤히 밝혀 주는 문자와도 같은 그림 이였기 때문이다. 민중을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했으나 화려하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열정적 이였으나 야단스럽지 않았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일관되게 흔들림 없는 ‘민중의 벗’이였음을 증거 하는 것은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들이 담겨진 수많은 도미에의 그림들로 대변되고 있다.

만화 외에도 그가 그린 유화와 수채화를 살펴보면 민중들의 삶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졌는데 사진조차도 전달하기 힘든 깊은 정서적 울림마저 표현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유화 중 하나인 '3등 열차'와 대표적인 수채화 '1등 열차'를 보면, 그가 얼마나 민중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는지 알 수 있다.


도미에는 주로 석 판화로 만화를 그리며, 그 주제를 유화나 수채화, 소묘나 목판화 심지어 조각으로도 되풀이 했다. ‘만화와 순수 미술을 통일한 최초이자 유일무이의 화가’이었던 것이다. 어떠한 가치의 유무는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무엇이 전자이고 후자이던 단지 그에겐 표현 방법의 차이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 에서 태어나, 5세 되던 해 유리 직공 일을 하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게 되었고, 14세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실명할 때까지 줄 곳 시대와 정치를 날카롭고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 정치만평 만화가로 살았고, 풍속 화가로서 화폭에 담은 몇몇 유화와 수채화 외에 조각도 남아있지만 그의 삶은 온전히 공화정에 대한 열정과 민주적인 삶에 대한 애착과 평화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를 풍자하는데 받쳐졌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로 화단에 데뷔하지만, 1832년 당시 국왕 이였던 루이필립과 정치가들을 풍자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했다. 그중에서 ‘가르강 튀아(Gargantua)- 대식가’를 게재한 것이 문제시 되어, 결국 벌금 500프랑을 선고 받고 6개월간의 옥살이 까지 겪었지만 그의 풍자 활동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1835년 언론탄압의 강화로 잡지의 발행이 금지가 되자 도미에는 사회, 풍속화로 전환하여 다시 화단에 들어갔는데, 풍속 풍자 작품들을 통해 민중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함이었고, 대표작품으로 ‘세탁하는 여인’, ‘3등 열차’, ‘관극’(觀劇), ‘돈키호테’ 등의 걸작을 남겼다. 석 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며, 석판화 제작 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그 후로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했다.


1872년, 2만여 명이 학살되고 처형당한 피의 일주일로 파리코뮌이 막을 내리게 되었고, 설사가상으로 시력마저도 잃게 된 도미에는 더 이상 민중의 답답한 시야를 밝혀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위고를 비롯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열린 자신의 생애 첫 개인전도 보지 못한 채 1879년 마침내 파란의 삶을 마쳤다.


1870년과 1877년, 두 번의 레종 드뇌르 훈장의 수여도 거부했던 그는 단 하나의 생전 소원대로 파리 동부의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에 안착 되었다. 그곳은 147명의 마지막 희생자들이 정부군과 독일 군에 의해 사살된 파리코뮌 최후의 현장 이였다.


그의 묘비명 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사람들이여, 위대한 예술가 이자 위대한 시민, 선인 도미에 여기에 잠들다.”


오노레 도미에, 그의 본연은 ‘시사 풍자만평’ 이었다. 풍자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았으며, 참사를 고발하는 판화 연작도 끊임없이 줄지어 그려 뎄다. ‘시사 풍자만화의 아버지’라는 찬사가 그의 뒤를 따르지만, 아마도 그의 묘비명에 적힌 ‘위대한 예술가 이자 위대한 시민, 선인’이란 표현을 더욱 좋아했을 법한 인물이라 전해지고 있다.


BONUS NOTE:


도미에의 만평이 지금까지도 유독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를 필자는 만화의 위치를 대중예술의 최고 단계까지 격상시킨 프랑스문화의 예술에 대한 오마쥬(향유)정서로 꼽아 보았다.


또 한 가지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우리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장면들로 우스꽝스럽고 재치 있게 묘사해 냈다는 점이다. 그의 도발적이고 유머러스한 풍자코드는 어렵고 힘든 시기의 민중을 웃게 했으며,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그 웃음은 전해져 오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작가의 삶과 시대의 모습들은 그들의 작품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차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해석을 통해 현 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새롭게 탄생되어지기도 하는데, 결국 본질을 추구하다 보면 시대를 초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의 본질은 같다는 말과 상통한다. 필자역시 이러한 예술의 불변의 본질상을 바탕으로 지난 2017년 구나현 작가와 ‘시대의 얼굴들’ 전시를 기획한 바 있다.


풍자만화나 만평은 그 시대의 흐름을 타게 마련인데 실시간 볼거리가 넘쳐나는 지금의 우리에게 풍자만화 나 정치, 시사만평이 예전만큼의 극상의 논란거리가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만평이 지닌 힘이기에 필자 역시 오늘의 만평을 눈여겨본다.


동시대의 한 민중으로서 후대에 오마쥬(향유)될 우리시대의 사이다만평, 풍자 예술가의 탄생 또한 고대해 본다.


홍소민 이서갤러리 대표 aya@artcorebrow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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