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현대차 공장서 1년.. 서울서 만난 매력적인 사람
[소준섭 기자]
쇠락하는 시대, 현실의 고민을 잊고 원고지와 씨름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90년대에 이르러 민주화운동 진영은 급속하게 쇠락해갔다. 나는 노동현장 경험을 위해, 또 나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울산에 내려가 현대자동차 하청공장에서 하청노동자로 1년 동안 일했다.
같은 컨베이어벨트에서 현대자동차 정규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을 했는데, 월급은 고작 그들의 1/3 정도였다. 주야 2교대 근무로 이른 아침에야 퇴근해 잠을 청해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고, 한밤중 심야노동도 무척 힘들었다.
1년의 '노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광화문 쪽에 난방도 되지 않는 방 한 칸에서 살았다. 이제 어떻게 '운동'을 새롭게 실천해 나가야 하는가의 고민에 앞서 우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때 마침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가까운 사직도서관과 정독도서관을 비롯해 거의 모든 서울 시내의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면서 집필했다. 당시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직접 원고지에 글씨를 꾹꾹 눌러쓰며 한 권에 200자 원고지 약 1400~1500매 정도 썼다. 1년이 훨씬 넘게 소요된 이 집필은 총 3권 분량으로 거의 5000매의 많은 분량을 쓰는 바람에 나중에는 손목이 너무 아파서 자주 며칠 씩 쉬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무척이나 드라마틱했던 사마천이라는 인물에 매료됐고, 동시에 마치 지금 내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처럼 생생한 필치로 묘사되는 역사 인물들과 사건들에 다시 푹 빠지게 됐다. 명문(名文)은 너무도 많았고, 내 마음 깊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과 사건들이 곳곳에 묻혀 있었다. 매일 같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필에 열중했다. 현실의 모든 고민을 잊고 원고지와 씨름했던 시절이었다. 또 나 자신을 추스르고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해 찬찬히 성찰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책 표지 |
ⓒ 소준섭 |
역사란 결국 인간 활동의 기록이다.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눈은 언제나 '인물'로 향했다. 비범한 인재에 대한 사마천의 애정은 <사기> 곳곳에서 발현된다. 그는 인물의 탁월함을 묘사할 때, 특별히 '아름다울' '가(嘉)'와 '능력이 있다'는 '능(能)' 자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단언한다. "현능(賢能)한 자가 기용되지 않음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수치다." 그리고 또 말한다. "국가의 안위는 명령에서 비롯되고, 국가의 존망은 인사에서 결정된다." 사마천이 2000년 지난 오늘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금언이다. 하지만 사마천의 관심은 비단 황제나 제후 그리고 소수의 영웅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지혜란 결코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에 독점돼선 안 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단지 성공과 실패만으로써 영웅을 판별하는 잣대로 삼지 않았다. 그의 눈에 영웅이란 결코 성패에 의해 논할 범주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던 사람이나 정(情)과 의(義)를 중히 여겨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 모두 참된 영웅이었다. 사마천은 그러한 인물들을 숭앙하고 그들의 행적을 한 글자 한 글자 심혈을 기울여 묘사하고 기술해냈다. 그리하여 <사기>는 인간과 역사의 근본에 대한 가장 통절한 서사(敍事)다.
그러나 정작 그가 평생 모든 힘을 바쳐 저술했던 이 대작은 그의 생전에 공개될 수 없었다. 그에게 궁형(宮刑)이란 천형을 내린, 하지만 그가 궁중에서 모셔야 했던 한무제에 대한 준열한 비판과 매사에 불의하고 부정하게 진행됐던 궁중 권력투쟁에 대한 거짓 없는 사실 묘사 때문에 서한(西漢) 시대 내내 금서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었다.
세계의 정말 위대한 작곡가들이나 예술가들이 세상을 떠난 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세상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게 돼 우리들의 애석함을 더한다. 사마천 역시 세상을 떠난 뒤 200~300년이 흐른 동한(東漢)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기>라는 이 명품은 소리 없이 세상에 널리 퍼져나갔고, 사마천의 이름 또한 영원한 빛을 발하게 됐다.
30대 초 내게 찾아온 '내 인생의 책', <사기>
나의 <사기> 집필은 1년 여에 걸친 작업 끝에 마침내 1994년 4월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불과 며칠 만에 다시 책을 찍어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원고료 매절로 넘겼기 때문에 내 수중으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 본명이 아니라 '김진연'이라는 필명을 썼다. 그렇게 모두 3권이 잇달아 출간됐다.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쇠락하는 운동과 생활고 속에서 번민해야 했던 내 30대 초반에 역사와 삶에 대한 지혜와 용기를 제시해주며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해줬던 책이었다. 그리고 다시 20여 년이 흐른 뒤 그것이 인연이 돼 필자는 대학 본과수업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사기> 책을 내걸고 한 한기 동안의 강의를 했다.
30대 초 내게 찾아온 책, <사기>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내 인생의 책'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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