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21
[이병길 기자]
오택, 1913년 결혼을 하다
최천택과 박재혁이 동국역사를 등사하고 배포하는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시절, 오택은 입학할 때부터 상업학교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일본인 점원으로 취직할 생각이 없었기에 일본어 학습에도 등한하고 주산과 부기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1년 동안 잘 놀고 2학년이 되어 서울에 가서 의전에 입학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동래고보에 다닌 명진학교 친구인 김형기와 황용주가 경성의전에 진학할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었다.
1913년 3월 오택은 2학년에 진급했지만, 경성의전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부모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단호히 허락하지 않았다. 한약방을 했던 부모의 처지에서 권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의술은 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죄를 짓게 되고 평생 마음의 짐이 되니 매사 긴장하며 의술을 해야 하니 편안한 시간이 없으니 직업적으로 보아 좋지 않다는 것이다.
선대로부터의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였다. 또 오택이 외동아들이라 서울로 가면 집안이 텅 빈듯하니 또한 반대하며, 결혼하기를 권했다. 상업학교를 일단 졸업하고 난 뒤에 일본 유학하라고 하였다.
▲ 오택 부부 결혼 30주년 기념 오택은 부산을 대표하는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사진 제공 :외손자 박윤수 |
ⓒ 이병길 |
경남의 예비 독립투사들을 만나러 여행을 다니다
1913년 2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무전여행을 도보로 하였다. 양산, 언양, 경주, 영천, 대구 등지로 한 달 동안 두루 다니며 소득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를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훗날의 사건을 참작하여 본다면 양산에서 김덕봉, 김봉길, 서상건 등과 통도사의 스님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훗날 3·1만세 운동과 김상옥의 혁신단, 김원봉의 의열단으로 활동한 인물들이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것, 오택의 여행은 예비 독립투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당시 오택은 양산을 거쳐 통도사를 지났을 것이다. 당시 양산에서 김덕봉(1898~1969)과 서상건(1899~1960), 전병한(1901~1986), 엄주태(1900~1928), 전병건(1899~1950) 등이 있었다. 엄주태, 전병한, 서상건, 김덕봉은 양산공립보통학교 3회(1915년 3월) 졸업 동기생이고 전병건은 2회 졸업생이다. 서상건은 1912년 4월부터 1914년 3월까지 부신진공립보통학교에 재학하다가 다시 양산으로 전학을 갔다. 좌천동 11통 1호에 거주하였는데 그도 정공단의 아이였다. 이런 인연이 오택과 맺어져 양산의 인물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엄주태와 전병건은 양산 3·1 만세운동과 양산청년회 활동의 주역이다. 특히 전병건(전혁)은 양산농민운동을 하며 양산경찰서 습격사건을 주도한 인물로, 훗날 김정한의 소설 <길벗>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통도사에는 박민오(1897~1976)와 신화수(1898년생), 오택언(1897~1970) 등이 스님으로 공부 중이었고, 인근 지산마을에 김봉길(1897~1974)이 살고 있었다. 오택언과 신화수는 양산 통도사 3·1 만세운동 관련자이며, 신화수는 박민오, 감상옥과 함께 <혁신단보>를 만들고, 한신 등과 1920년 육혈포암살단을 조직·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혁신단 박민오와 오택이 연관되어있었다.
양산 통도사 출신 스님 박민오(박치오, 박노영, 1897~1976)는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대동단에 가입하여 부산의 오재영(오택), 양산의 김덕봉, 김봉길, 서상건, 통도사 스님 신화수 등과 함께 독립군자금 모금과 제2차 독립운동을 시도하였다. 관련자들은 1921년 5월 12일 진주경찰서에 적발된 적이 있다. 당시 박민오는 통도사 출신 스님 신화수와 김상옥 등과 함께 <혁신공보>를 발간하며 상해 임정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갔기에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통도사 승려 출신으로 3·1운동 학생 대표로서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는 등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 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드물게 승려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하버드대학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문학에도 자질이 뛰어나 '동양의 마크트웨인(Oriental Mark Twain)'이나 '친선 문화대사'로 일컬어졌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당시 오재영(오택)은 서울에서 김인태, 김상옥, 강낙원 등과 활동하고, 그 후 상해 임정 연통제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19년 오재영은 독립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정에 보내는 김두현(金斗鉉, 경남 하동, 27세)을 만나 협의한 한 일이 있었다. 김두현은 50전짜리 은메달에 앞에는 태극기와 독립기념을, 뒷면에는 민국원년(民國元年)을 새겨 부호들에게 주고 독립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오재영은 좌천동 자기 집에서 김두현과 김두옥을 만났다. 일찍이 윤태선(尹台善)이 보내준 '조선임시정부13도 총감부' 명의의 사령서 2장과 유고문(諭告文) 몇 장을 두 사람에게 주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9년 9월 김봉길은 중앙학림에 재학 중인 통도사 승려 박민오, 박상수가 경성 탑골공원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박민오는 김봉길에게 부탁하였다. "지금 독립운동하는 대동단에서는 10월 1일에 경의선(京義線), 경원선(京元線), 경부선(京釜線)의 세 구역으로 구분하여 제2회 독립운동을 시작할 터이니 경부선의 선동을 맡아달라."
이에 김봉길은 승낙하고 박민오에게 독립신문 7장과 경고문 5장, 경부선 연변의 인민선동을 맡은 위임장, 여비 40원을 받았다. 통영, 진주, 남해 지방으로 김봉길은 다니며 독립운동을 선동하였다. 김덕봉은 1919년 9월 박민오의 전보를 받고 부산 영남여관에서 "전조선 제2회 독립운동을 선동하라."라는 위임장을 받는 동시에 독립신문 25매와 경고문 10장을 받은 후 서상건과 공모하고 오재영에게 독립신문과 경고문을 배포하고 선동하였다. 이 당시 양산의 엄주태, 전병건은 만세운동으로, 신화수는 육혈포암살단 사건으로 감옥에 있었다.
한편 최천택은 동국역사 배포 사건 이후 자유로운 거동이 쉽지 않았다. 왜경의 감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부산공립상업학교 3학년 때 그는 울산, 경주, 양산, 밀양 등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들을 만나 규합하였다. 양산에서 엄주태를, 밀양에서 김원봉을 만났다. 엄주태는 동경 2·8 독립선언을 한 김철수의 자형인 박인표의 딸인 박분행과 결혼한 양산 3.1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다.
장인 박인표는 1910년 조선국권회복단원이었다. 엄주태의 부친은 양산군 참사를 지낸 엄우영이다. 그의 형은 기장군수를 지낸 엄신영으로 상해 임정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의 장인이다. 엄주태는 만세운동 이후 양산청년회 활동을 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엄주태가 만세운동을 하게 된 것은 동래에 사는 친척인 엄진영과 엄우영이 부산 동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두 형제는 부산 동래고보 학생이었다. 엄진영(嚴進永, 1899~1947)은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투쟁을 계속하였고, 동생인 엄병영(嚴秉永, 1902~1974)은 동래고보 선배인 최현배(崔鉉培)의 권유로 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을 이용한 속기 방식을 개발하였다.
밀양의 김원봉 역시 1914년 봄 동저고릿 바람에 바랑을 등에 지고 명산승지를 찾아 무전여행의 길을 떠났다. 그가 짊어진 바람 속에 들어있는 것은 몇 권의 서책이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1914년경 경남지역의 청년들은 무전여행의 붐이 있었는지 하나둘 바랑을 지고 국내를 돌아다녔다. 오택, 김인태, 왕치덕, 최천택, 김원봉이 그랬다. 당시는 무전여행을 하여도 어디에서나 과객을 섭섭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사람이 장한 뜻을 품고 있음에 놀라 감동하며 씨암탉을 잡아 대접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인정이 남아있는 시절이었다. 김원봉은 표충사. 지리산, 계룡산, 경주, 부여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때 그는 부산에서 인상 깊게 만난 사람이 바로 김철성이다. 장래 국사를 같이 하자면 굳게 다짐을 하였다. 김철성(金鐵城)이 바로 정공단의 아이 중의 한 명인 김인태(金仁泰)였다. 1916년 김원봉은 중국 텐진에 있는 독일학교에 유학길을 떠났다. 그때 유학경비를 댄 사람이 바로 부산의 최천택이었다. 약산 김원봉의 친구로 그를 은근히 경모했던 한봉인(韓鳳仁) 역시 친척 집에서 몰래 들고나온 돈을 보태주었다.
1914년 오택, 일본 유람을 하다
1914년 4월 박재혁과 최천택은 부산공립상업학교 3학년에 진급하여 졸업반이 되었다. 하지만 오택은 3학년에 진급할 수 없었다. 아마 학업을 등한시한 결과, 진급시험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의 자전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진급이 되지 않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다음은 오택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 박재혁과 친구들 -박재혁(왼쪽) 의사가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시절 친구들과 찍은 사진. |
ⓒ 이병길 |
조선의 산천이 황폐하고 농촌이 파멸 상태인 것에 비해 일본의 산은 미려하고 수목이 울창하고 농촌이 부유한 것같이 보였다. 하지만 고베(神戶)나 오사카(大阪)의 도시풍경은 부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부산은 일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토(京都)는 신축 건물이 아름답고 역전에 수십 대의 자동차가 즐비한 것은 처음 보았다. 서양식 호텔 전용차를 미행 형사에게 부탁하여 타고 교토 제일의 산양호텔에 갔다. 호텔 입구에서 오륙 명의 보이가 환영하고 호텔 역시 활동사진에서 본 풍경 그대로였다.
미행 형사가 오택을 조선 귀족이라 소개한 듯 '각하(閣下)'라 존칭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그를 '오남작(吳男爵)'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이 모두가 일본 형사 때문이었다. 호텔 일주일 경비가 봉사료 등을 지불하니 보통 고급여관 일 개월의 비용이 들어 결국 오택은 금각사 부근의 한적한 고급 하숙으로 옮겼다.
동지사(同志社) 대학을 방문하여 신학부생 오상순(吳相淳, 1894~1963), 중학부의 유억겸(兪億兼, 1895~1947)을 만났다. 교토에서 만난 두 사람을 통해 입학에 대해 알아보고 2개월 준비 후 신학기에 입학하기로 작정하였다. 오택은 반년은 놀게 되었으므로 나라(奈良),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를 거쳐 도쿄(東京)로 갔다. 도쿄에서 만난 고향 사람은 교토 같은 시골보다는 동경 유학을 권했다. 당시 오택이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유학생들에 부정적인 모양을 본 것 같다.
동경을 보고 난 뒤 오택은 봄 신학기까지는 준비기간이라 일본 각 지방을 다니기로 했다. 2주일 동안 다니니 더 이상 볼 것 없어 닛코(日光)로 갔다. 그때 동경 경시청 다카야마(高原) 형사를 데리고 갔는데 그가 또 귀족이라 소개한 듯 일광서장과 경호 주임이 마중을 나왔다. 닛코의 여관에는 남녀 100명이 좌우 양편에서 갈라 꿇어앉아 절을 하며 오택을 반겼다. 교토의 남작 시절 이상의 환대를 받았다.
숙소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10여 명 하녀가 한가지씩 임무를 하고 갔다. 전속 하녀는 주야 투숙 근무하며 이야기 상대도 하고 신문과 소설도 읽어주어 심심치 않게 하였다. 월급 받는 하녀는 10여 명 정도이고 나머지 하녀들은 팁만 받고 생활하는 농민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빈곤한 가정 출신이라 여행 온 남자와 결혼하거나 소실이 되는 행운을 기대하며 모여든 여자들이었다. 10월 초순이라 손님 없는 시절이라 오택은 여관 전체를 대절한 듯하였다.
닛코는 동경 인근에 있으며 풍요로운 자연으로 여름 피서지로, 가을 단풍 관광지로 유명하다. 경찰 서장의 안내를 받으며 오택은 닛코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 동조궁(東照宮 토오쇼오구우)은 1617년 초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사후 그를 제신으로 모신 신사이다. 이곳은 고관이 아니면 구경하지 못했지만 오택은 들어갔다. 동조궁 내의 대다수 사당과 전각들은 삼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 1604~1651)에 의해 1636년 새로 지어진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집결된 장인들에 의한 옻칠과 극채색이 구사된 호화찬란한 조각이 압권인 건축물들로 현재 국보 8채, 중요문화재 34채 등을 포함한 55채가 자리 잡고 있다. 동조궁의 심볼이라고 할 가장 호화찬란한 문인 양명문(陽明門 요오메이몬)은 눈부신 금과 흰색으로 채색된 장엄한 모습은 사진에 담는 것만으로 금전운이 올라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평화를 기원하는 '잠자는 고양이'와 '보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말라'는 '삼원(三猿, 세 마리의 원숭이 조각상)'을 건축물에 새겨놓았는데 놓칠 수 없는 볼거리라고 한다.
▲ 조선진신내지시찰단 -왕복 4주간 1만 5천 리 여정 일본 여행 중 닛코의 동조궁. 출처: 每日申報(1914.03.21) |
ⓒ 每日申報 |
당시 조선 총독부는 야만상태인 조선은 문명화된 일본의 문화정치를 통해 문명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문화정치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것들이 총독정치를 통해 가능해졌기 때문에 식민정책이 곧 문명화라고 강변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총독부의 정책을 일본의 닛코 주민들은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오택은 조선이 열등한 민족이 아닌 문명국임을 역설적으로 알려주었다. 여관주인의 요청도 있었지만 오택은 여관주인과 인근 친지, 하녀들을 모아놓고 조선의 금강산, 인삼, 잣, 김치 등이 세계 제일이라며 이야기하였다. 또 닛코의 지방유지 20여 명과 좌담을 하여 조선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며 조선은 일본보다 수천 년 선진국이고, 동방예의지국이라며 조선의 좋은 점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글씨를 청하기에 서당에서 자주 썼던 용호(龍虎) 두 글자를 선물로 써주었다.
오택이 만난 일본 유학생들
오택이 도시샤[同志社] 학교에서 만난 두 사람의 삶은 서로 달랐다. 도시샤 대학은 당시 기독교계 학교였다. 두 사람은 그때 기독교인이었다. 정지용과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 대학 출신으로, 이들의 시비(詩碑)가 교내에 있다.
시인 오상순은 호는 선운(禪雲), 공초(空超)로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불교로 개종하였다. 1921년 조선중앙불교학교, 1923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전국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참선과 방랑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대부분의 세월을 방랑과 담배연기, 고독 속에서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부산의 김형기, 최천택, 이기주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김형기의 동산의원에는 일제 강점기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또 김형기의 동생 김형구의 구포 근산병원에도 드나들었다고 한다.
오상순의 사상은 3·1운동 실패 직후의 식민지 한국의 현실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있다. 1920년 <폐허>창간호에 실린 「시대고와 그 희생」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요,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이다. 이 말은 우리 청년의 심장을 쪼개는 듯한 아픈 소리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아니 할 수 없다.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것을 의심할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이 폐허 속에는 우리들의 내적, 외적, 심적, 물적의 모든 부족, 결핍, 결함, 공허, 불평, 불만, 울분, 한숨, 걱정, 눈물, 멸망과 사의 제악이 쌓여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만 죽고 말 것인가? 아니다!"
유억렴은 유길준의 둘째 아들로 도시샤중학교 보통부를 졸업하고 1922년 3월에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중앙고보 교사와 연희전문 법학 교수, 연희전문학교 부교장를 거쳐 교장이 되었다. 1920년대 신간회, 기독교계의 항일민족주의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에 가입 활동하였으나 1930년대부터 친일 반민족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일제 말기에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여 잡지 <조광(朝光)>에 "전필승 공필취(戰必勝 攻必取, 싸워서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여 반드시 탈취하라)"라는 글을 통해 선전 대열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의 문교부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오택은 동경에서 만난 고향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오택이 도쿄 유학생들을 보니, 착실한 학생은 보이지 않고 불량배만 각 대학 전문부에 월사금만 납부하고 주색잡기와 유흥을 일삼는 자만이 보이었다. 강제 병합 삼사 년 후 사오백 명이 유학하고 있다고 하나 지도기관이 없고 자유 산만하여 풍기가 혼란하여 진실한 학생은 지방으로 전학하고 착실한 학생은 은거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910년대 일본 유학생의 85%가 동경에 유학했고, 사비 유학생은 90% 이상이었다. 일본 유학의 목적은 신학문의 수용이었다. 그것은 구국을 위한 길과 입신출세를 위한 길로 나누어졌다. 일본은 조선이라는 낡은 문명의 공간에서 벗어난 광명의 공간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학문을 약육강식의 경쟁 사회에서 입신출세의 도구로 인식했다. 이는 사회를 활성화하고 국가경쟁력을 길러나갔다. 일본 유학생들도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본격적인 일본 유학은 190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대한제국 정부가 양반 자제 50여 명을 선발하여 '한국황실특파유학생(韓國皇室特派留學生)'으로 보낸 이후 관비와 사비 유학생이 증가하여 1908년경에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905년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가 최초로 만들어진다. 그 후 대한유학회, 낙동친목회, 호남학회, 공수회 등 10여 개의 유학생 단체가 난립했다. 1909년 1월 유학생연합단체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가 탄생하는테 창립 초기 550여 명의 회원이 있었고, 핵심 임원진으로 최린, 허헌, 고원훈, 송진우, 김성수 등이었다. 강제병합 징후를 포착하고 1910년 6월 이를 반대하는 결의문을 정부에 전달하려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912년 10월 27일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약칭 학우회)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오택이 간 시절은 이런 혼란이 다소 수습되던 시기였다.
1914년경 부산지역의 유학생으로는 부산상업학교 출신인 김철수와 구명학교 출신인 윤현진 그리고 양산 출신의 이규홍이 있었다. 이 세 사람 모두 출신 지역이 양산 상북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철수(金喆壽, 1896~1977)는 1913년 7월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윤현진과 이규홍은 1914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철수는 동경 2·8 독립선언을 하였고 윤현진과 이규홍은 상해 임정의 차장을 지낸 인물이다. 김철수와 윤현진은 재동경한국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여 유학생학우회에서 발행한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참여하였다.
특히 윤현진은 신익희·이광수·장덕수·최팔용·김도연·송계백·백관수·김철수(金綴洙) 등과 두터운 교분을 맺으면서 조선인 유학생과 중국인 황각(黃覺) 등을 비롯한 유학생 40여 명과 함께 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세울 목적으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하였다. 핵심 회원들은 <학지광(學之光)> 에 참여했다.
▲ 동경 2.8 독립선언 출옥 기념사진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은 3.1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었다 |
ⓒ 독립기념관 |
1914년 후반은 경제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인해 개인주의와 중금주의가 팽창한 시절이었다. 유학생들이 자유 산만하여 풍기가 혼란한 이유는 당시 유학생들이 구식결혼의 희생자로 자신을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유학생들은 대개 일본 유학을 오기 전 조선에서 부모의 강압에 의해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한 구여성(舊女性)과 결혼한 기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본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新女性)들과 자유연애를 구가하면서 구여성과의 이혼, 신여성과의 결혼문제로 번민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런 모습을 오택이 목격한 것 같다.
오택은 일본에 계속 머물며 유학할 생각으로 부산의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내 학비를 청구하니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귀국하라는 편지가 왔다. 오택은 일본이 굉장한 줄 알고 왔는데 막상 실상을 바라보니 빈약했다. 일본의 관민은 한일합방에 관심이 없고 대개가 군벌주의자이고 정치인 몇 사람이 전 동양을 지배하고 싶을 뿐이고 전 국민은 러일전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낸 세금으로 본국의 유지도 못 하면서 조선에 보조함은 불가하다고 원망하는 자도 있었다. 오택은 일본 여행을 마치며, 공부보다는 국권 회복에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지 규합에 힘쓰기로 하며 귀국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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