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엔 한달 일해 집 샀다" 55년 전파사 문닫는 해방둥이
"55년 만에 폐업합니다. 그간 감사합니다" 낡은 전파사 출입문에 최근 이런 손글씨가 적힌 종이가 붙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홍연시장 버스정류장 옆, 라디오나 TV 등 전자기기를 고치는 곳이다. 버스정류장에 있던 한 60대 동네 주민은 "아저씨가 오래 동네를 지키며 뚝딱뚝딱 잘 고쳐주던 곳”이라며 아쉬워했다.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켰던 전파사는 왜 문을 닫게 됐을까. 호기심에 이끌려 지난 15일 전파사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건 낡아 보이는 공구들과 전자기기들이었다. 주인 김만기(76)씨는 낡은 전선에서 피복을 벗겨내고 구리를 빼내고 있었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김씨는 “귀가 잘 안 들려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망설였다. 기자가 큰소리로 질문을 하고 김씨가 답을 하기로 했다. 잘 안 들릴 때면 스마트폰 메모장에 질문을 적었다. 그렇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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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부터 한 자리 지킨 새마을운동의 '주축'
아무리 오래된 가게라도 문을 닫는 게 당연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김씨의 답변도 비슷했다. "이제는 장사가 안돼. 하루에 2~3만원 벌기도 어려워졌어. 동네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편했는데 왜 그만두냐고 해. 첫째, 수입이 없으니까. 코로나 영향도 있고. 코로나는 수입보다는 내가 밖을 예전처럼 못 돌아다니는 게 문제야. 또 내가 몇 년 전 암 수술을 받았어. 몸이 약해졌어. 이제 물건 다 정리하는 중이야."
휴대전화 메모장에 다음 질문을 적는 동안 사장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계속해서 낡은 전선에서 구리를 빼내고 있었다. 전파사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그는 경남 밀양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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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탈출 위해 상경한 해방둥이
"나는 1945년생 해방둥이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살 때 무작정 올라왔어. 서울에서 돈을 벌고 싶어서. 12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아침 9시 서울역에 내린 게 아직도 기억나. 큰 빌딩도 없는데 서울역 앞이 엄청 복잡해 보였어. 전차가 지나다니고 지게꾼들이 다니더라고. 지게꾼들을 보고 나도 저 일을 해볼까 싶었는데 결국 나는 막노동부터 시작했어."
어려움도 서러움도 많았지만 다 견뎌냈다고 했다. "반찬은 간장에 밥만 먹고 옷은 남대문 시장에서 헌 옷 사다 입고. 그러다 '안 되겠다. 기술을 좀 배워야겠다' 해서 전파사에서 숙식만 하면서 기술을 배웠어. 한창 새마을 운동을 할 때야. 우리 세대가 새마을운동 주축이잖아. 1966년부터 69년까지 배우고 그다음 군대에 가서 원주 1군 사령부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어. 72년에 전역하고 다시 이 동네 전파사에서 돈을 벌어서 지금 이 가게를 차렸지. 66년부터 근처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 55년이 됐다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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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서 구타당해 청력 잃어
그는 군대에서 선임병에게 구타를 당해 청각 일부를 잃었다고 했다. 전역 이후 십 년도 넘게 지난 뒤 수술을 했지만, 청각장애는 악화됐다. 김씨는 지금의 전파사, 본인의 가게를 갖게 된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홍제천이 지금 위치가 아니라 산 밑으로 둘러 흘렀어. 서울에서 철거민들이 쫓겨나와서 이 근처에서 집 짓고 살았어. 나는 초창기에 그 사람들이랑 같이 들어왔어. 옛날에는 전구 하나를 사려면 고개를 넘어서 연대 앞 신촌시장까지 나가야 했어. 포장도로도 없고 시금치밭뿐이었어. 근데 전파사가 생겨 동네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됐어.”
전파사에서 일하던 김씨는 근처 편물점에서 일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고 했다. 당시에는 흔치 않던 연애결혼을 했다고 자랑하며 소년처럼 웃었다. "동네에 유일하게 공중전화가 있는 곳이 전파사였어. 편물점 아가씨가 자주 전파사에 오길래 자주 보니 정도 들고, 내가 기술도 있고 하니까 만나서 결혼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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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엔 한 달 일해 집 살 정도로 호황"
70년대는 김씨에게 호황이었다. "전파사를 내 힘으로 열자마자 장사가 잘됐어. 그때 이 동네 양옥집 한 채가 60만~70만원이었어. 그때는 하루 일하면 3만원을 벌었어. 한 달이면 집 한 채를 사고도 남지. 근데 그때 두 동생 대학공부 시키는 돈으로 다 나갔어. 3남매도 키우고…."
동생들과 자녀들 이야기를 하던 김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80년대에 대우전자 대리점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본사 직원들이 영업을 나와서 혹해서 대리점을 했네. 10년 가까이. 그때는 돈을 잘 못 벌었어. 직원들 4~5명 월급 주느라. 90년에 대리점을 접고 다시 전파상을 했어. 나중에는 사람들이 잘살기 시작하면서 가전제품을 쉽게 버리고 쉽게 사게 되니까 조금씩 매출이 줄어들었지. 그래서 철물점도 같이 하게 됐어."
성실하게 보낸 세월 덕분에 ‘장인 대접’을 받기도 했다. 2017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김씨를 인터뷰하고 그가 수리한 오래된 가전제품들을 전시했다고 한다. 집에는 500점이 넘는 '골동품 가전'들을 갖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 무작정 올라왔는데 동생들, 자식들 대학 보내고 손주들도 이제 다 대학을 다니게 됐어. 전파사 폐업한 뒤 이 2층 건물은 재건축할 거야. 다른 가게들이나 집이 들어오겠지. 여생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나 하나 건강 잘 챙기면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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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다하면 좋은 기회 잡을 수도"
그는 요즘 젊은 세대가 힘든 걸 안다고 했다. 새마을 운동의 ‘주축’으로 헐벗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기에, 더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가난이 싫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다고 했던 시간이 어느덧 이렇게 흘렀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좋은 때를 잡을 수도 있어."
낡은 전선에서 구리를 빼낼 때도, 기자가 질문을 적는 동안에도, 사포를 사러 온 손님을 맞을 때도 김씨의 경쾌한 콧노래는 계속됐다. 55년을 지킨 전파사는 3월부터 홍제천변 풍경에서 사라지겠지만, 거칠어진 손을 놀리며 흥얼대는 그의 노래는 어디에선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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