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형 세계무역기구 수장 오콘조 "코로나 백신, 모든 나라에 공정해야"

전수진 2021. 2. 17.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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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재무장관 때 석유개혁
모친 납치돼도 밀어붙인 강골
세계은행 총재 출마 때 김용에 져
이번엔 유명희 꺾고 WTO 사무총장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세계무역기구(WTO) 신임 사무총장. 나이지리아 부족 리더의 딸인 그는 전통 복장을 즐겨 입는다. AFP=연합뉴스

“세계은행 총재는 제가 아닌 김용 총장이 맡을 겁니다. 능력보다는 미국 중심의 정치적 고려 때문이겠지요. 아프리카 출신 여성 후보로서 선전했다는 데 의의를 둡니다.”
2012년 4월16일(현지시간) 나이지리아 경제학자자 재무 관료인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가 기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오콘조-이웨알라는 당시 다트머스대 총장이었던 한국계 미국인 김용 박사와 세계은행 총재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고, 패배했다. 영국 가디언은 당시 그의 이 같은 발언을 두고 “미국이 세계은행에 갖는 영향력은 크다”고 전했다. 가디언의 이같은 보도는 자국과 유럽연합(EU)의 입장에 기초한 것이다. 세계은행과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경제기구의 수장 자리싸움은 전통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힘겨루기였다. 당시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는 유럽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약 8년 뒤인 지난해, 오콘조-이웨알라는 다시 한국인 후보와 맞붙었다. 이번엔 세계무역기구(WTO) 수장인 사무총장 자리를 놓고서다. 시대가 바뀌었고, 미국이 변했고, WTO의 위상도 달라져 있었다. 8명의 후보자 중 결선까지 간 후보자인 유명희 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오콘조-이웨알라 모두 여성이다. 그리고 이번엔 유 전 본부장이 지난 5일 용퇴하면서 오콘조-이웨알라가 승리했다.

유명희(왼쪽) 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막판까지 오콘조-이웨왈라 후보와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AFP=연합뉴스


유 전 본부장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의 지지를 받았으나, 트럼프 자신이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탈퇴를 위협하는 등, 처음부터 판이 유리하지 않았다. 여기에 영국과 유럽이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똘똘 뭉쳐 지지했고, 트럼프 퇴임 이후 조 바이든 대통령 행정부가 다자주의 복원을 내세우며 힘을 실어줬다. WTO는 지난 15일(현지시간) 이사회를 열고 그를 사무총장으로 공식 추대했다. 임기는 2025년 8월까지다. 1995년 창립된 WTO 최초의 흑인이자 여성 사무총장이다. 미국을 비판하던 그는 2019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나이지리아와 함께 이중 국적을 보유 중이다.

승리가 확정된 뒤 오콘조-이웨알라는 “됐다! 역사가 새로 만들어졌다”며 “하지만 힘든 일은 이제 시작이며, 난 WTO의 도전과제를 풀 준비가 되어있다”는 입장을 냈다. 그는 특히 “지금까지의 관행은 잊어라”라고 적으며 WTO의 혁신을 선언했다. CNN 인터뷰에선 공정무역과 가난한 나라들의 백신 접근권을 강조하며 “WTO는 코로나바이러스 백신ㆍ치료법ㆍ진단검사의 공정성과 접근성을 보장하는 규칙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오콘조-이웨왈라 신임 WTO 사무총장은 유럽 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출신의 IMF 수장 크리스틴 라가르드(오른쪽) 총재는 페이스북에 "내 친구의 당선을 축하한다"고 올렸다. [페이스북 캡처]


WTO는 만신창이 상태다. 여러 갈등 중에서도 미ㆍ중 드잡이가 큰 골칫덩이다. 중국은 2001년 당시 미국의 묵인하에 개발도상국 지위로 가입했다. 이후 중국의 급성장하며 WTO는 미ㆍ중 사이 줄다리기의 경기장으로 전락했다. 자유무역을 기치로 걸고 전 세계 회원국의 경제 발전이 WTO의 존재 이유이지만, 각국이 보호무역주의로 기울면서 이마저도 퇴색해왔다.

WTO의 위상이 흔들린다며 로이터통신이 2018년 빨간불과 함께 송고한 사진. 스위스 WTO 본부의 로고다. 로이터=연합뉴스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을 지지하는 영국 매체들은 그의 리더십에 희망을 걸고 있다. 가디언은 15일 “신임 사무총장 취임 후 WTO는 더 좋아질 일밖엔 없다”고 보도했다. 그만큼 WTO의 위상이 현재 바닥이라는 반증이다. 영국 BBC도 “오콘조-이웨알라가 걸어온 길을 볼 때 그는 최적임자”라고 평했다. 미국 CNN에 오콘조-이웨알라는 “WTO를 리브랜딩하고 재정립하려면 큰 개혁이 필요하고, 내가 그 일에 적임”이라고 강조했다. 재무와 통화 정책 분야에선 잔뼈가 굵었지만 WTO의 주요 업무인 통상 분야 경험은 일천한 편이라는 평가도 나오지만, 그 특유의 돌파력이 강점이다. 그는 프랑스 언론 FR24에 "나는 파이터"라며 "돌파력으로 WTO를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오콘조-이웨알라의 이력서는 화려하다. 1954년생인 그는 1970년대 미국으로 유학,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으로 학사,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지역경제개발학으로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후 세계은행에서 25년간 경제학자로 근무하며 아프리카 지역의 국가 부채 해결 등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며 주목받았다. 2004년엔 세계은행 개발위원회 의장을, IMF에서도 국제통화 및 재무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국제금융계에서 아프리카의 별로 떠올랐다.

지난해 WTO에서 사무총장 선거 관련 기자회견에 나온 오콘조-이웨알라 당시 후보. 신화=연합뉴스


그는 고국에서도 맹활약했다. 2003~2006년, 2011~2015년에 걸쳐 두 번 재무장관을 지냈고, 2006년엔 외교부 장관도 잠시 역임했다. 나이지리아 사상 남녀를 막론하고 재무장관을 두 번 역임한 인물은 그가 최초다. 2006년 외교부 장관을 맡은 것은 전공 분야는 아니지만, 국제 분야 전문가인 만큼 국제사회에서 고국을 위한 구원투수로 등판한 격이었다.

그가 두 번째 재무장관직을 수행하던 2012년 나이지리아의 주요 자원인 석유 관련 산업의 개혁을 추진한 것이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당시 개혁 반대파가 의사인 그의 모친을 납치했으나 개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의사인 모친은 닷새 만에 무사 귀환했다. BBC는 당시 “석방 대가로 현금이 오갔는지는 현재로선 불투명하다”며 “나이지리아에서 납치는 워낙 흔한 일이라 1면 뉴스거리가 못 된다”고 전했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한 부족장의 딸로 태어났으며, 신경외과의사인 남편과 4명의 자녀를 뒀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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