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달러 거제의 추락.."YS·文 배출한 우리 좀 살려주이소"
[대통령 두 명 배출한 유일 지자체 거제는 지금]
2013년 전국 최고 5만달러 부자도시
조선 불황에 2015년 이후 내리막길
이제 전국평균 수준으로 소득 감소
여당 시장도 대우조선 매각 반대
저도 유람선 운항 중단, 관광 타격
문 대통령 생가 복원 사업도 연기
어떤 리더십이냐에 미래 운명 걸려
#설 연휴 전인 지난 9일, 해가 뜨기 전인 오전 7시.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서문 앞은 집회 구호 소리로 어수선했다. "2년을 길거리에 버려졌다. 더는 못 참는다." 금속노조 경남지부 조선 하청지회 소속 노조원들이 새벽부터 절규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밤샘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하청업체 노동자 박모(56)씨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는 "일감이 줄어서 설날 기분이 안 난다. 없는 사람이 더 어려워지니 미래가 불안하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던 1972년 바다 별장인 청해대(靑海臺)로 지정된 저도(猪島)가 2019년 9월 일반에 개방되면서 다도해 거제의 관광 자원이 하나 더 늘었다.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7월 여름 휴가를 보내며 '저도의 추억'을 그렸던 백사장이 있는 곳이다. 지난 8일 저도에 가기 위해 유람선을 예약했으나 관광객이 적어 취소됐다. 선사 측은 "코로나로 지난해 12월 7일부터 운항이 중단됐는데 2월 8일부터 재개하려다 다시 3월 8일로 연기됐다"고 말했다.
두 장면은 거제 경제의 두 축인 조선산업과 관광산업이 동시에 무너진 현주소를 보여준다. 조선산업과 관광산업이 쌍두마차로 거제 경제를 이끌던 호황기에 거제와 울산의 소득은 전국 평균의 2배에 육박했다. 실제로 2013년 전국 평균 국민소득(GNI)이 2만7351달러였을 때 거제는 5만152달러였다. 하지만 2018년에는 거제(3만5694달러)와 전국 평균(3만3563달러)이 비슷해졌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의 상징 인물인 김영삼(1927~2015) 대통령에 이어 인권과 평화를 외쳐온 문재인 대통령을 배출해 시민들의 자부심이 높았던 지역이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거제시는 기네스북에 '대통령 2명을 배출한 세계 유일 기초 지자체'로 등재하려다 미국의 한 카운티가 대통령을 2명 배출한 사실을 발견하고 접었다. 하지만 최근엔 거제에서 전·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특히 문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 연설문에서 국민 통합을 강조해 기대를 모았지만 지난 4년간 경제 실정으로 인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거제 지역 경제의 약 40%를 담당해온 핵심 산업 중 하나인 조선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추진해온 데 대해 현지에서는 최근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1월 31일 대우조선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약 4000억원을 출자하는 조건으로 현대중공업에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내 1위인 현대중공업과 2위인 대우조선의 합병은 이후 유럽연합(EU) 등의 독점 심사가 지연되면서 2년이 넘도록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독점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LNG선 감축을 내세워 합병을 서두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일감이 줄어들면 그만큼 노동자를 내보내야 하므로 대우조선 노조뿐 아니라 여당 소속인 거제시장까지 가세해 지난 1월 28일 정부에 매각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노동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신태호(46) 금속노조 대우조선해양 수석 부지회장을 거제에서 만났다.
-민노총을 밀어주던 '친 노동 정부'를 비판했다.
"친 노동 정부라는데 전혀 동의 못 한다. 촛불 정권이라면서 추진력도 없고 너무 못했다. 도대체 한 게 뭐 있나. 정규직 만들어 준다면서 결국 노·노 갈등만 늘었고 혼란만 키웠다."
-민영화해 세금(공적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옳지 않나.
"2008년 6조8000억원 받고 한화에 매각하려다 무산됐다. 2019년 1월 대우조선의 시가총액은 10조원이었다. 공적자금 8조원이 들어간 회사를 겨우 4000억원에 팔면 공적자금이 제대로 회수되겠나."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무언가.
"정부의 조선산업 정책은 반노동·친재벌이었고 거짓말을 했다. 명백히 문제 있는 매각 절차를 중단하고 철회하라는 거다. 대안은 공기업화 방안, 조선업체를 제외한 민간 기업에 매각해 민영화하는 방안, 독자 생존 방안, 산업은행 관리 체제 유지 방안 등이 있을 수 있다."
-민노총 주력인 금속노조 산하라 '귀족노조' 라 불리는데.
"2015년 5만명이던 직원이 지금 1만8000명으로 줄었다. 노조가 고통 분담도 많이 했다. 하청 노동자는 최저시급을 받고 일한다. 정규직도 숨만 붙어 있다."
변광용(55) 거제시장도 만나봤다. 그는 "2018년 첫 민주당 소속 시장에 당선돼 지난 3년간 중앙정부 공모사업과 교부금을 대거 끌어와 처음으로 예산 1조원 시대를 열었다"고 자부했다. 이처럼 집권당의 후광을 입은 시장조차 정부의 대우조선 매각 방침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이유가 궁금했다.
-여당 시장이 왜 정부 정책에 반대하나.
"당초 조선 빅3를 빅2로 만들 때 명분은 국내 조선산업 강화였다. 하지만 매각 기간이 2년 넘게 길어지면서 조건부 매각 승인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당초 합병 취지에 맞지 않는다. 조건부 매각 승인이 되면 대우조선의 일감이 급감해 인구 25만명인 거제 지역 경제가 직격탄을 맞는다. 정부는 이런 고민 없이 인수합병에만 매달리고 있다."
-시장이 생각하는 대안은.
"거제에는 삼성중공업도 있는데 왜 굳이 정서적 거부감이 있는 현대중공업에 팔아야 하느냐는 여론이 있다. 대우조선 내부에서는 조선 수주 사이클 상 앞으로 1년 반 정도 보릿고개만 잘 넘기면 독립 경영, 즉 독자 생존이 가능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관광산업도 침체했는데.
"대전~통영 고속도로 연장, 국도 5호선 창원~거제 4차로 신설, 서부경남 KTX 개통, 가덕도 신공항 건설, 공항철도 신설 등 교통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면 수도권의 잠재 관광객을 대거 유치할 수 있다. 연간 700만명인 관광객을 코로나 시대 이후 1000만명으로 늘리는 것이 단기 목표다."
-두 대통령 생가를 관광에 활용할 방안은.
"김영삼·문재인 대통령 외에 김우중 전 대우 회장까지 대한민국 VIP 인물을 중심으로 인생 스토리를 가공해 'VIP 로열 콘텐트'를 개발할 것이다. 사유지인 문 대통령 생가 복원을 취임 이후 청와대에 건의했지만, 대통령이 재임 중에는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단했다. 퇴임 이후 다시 추진할 것이다."
현지에서 들어보니 문 대통령의 출생 과정엔 안타까운 스토리가 있었다. 함경도가 고향인 문 대통령 부모는 6·25전쟁 와중에 1만 4000명을 태우고 흥남철수 작전을 수행한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를 타고 1950년 12월 25일 거제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미군이 나눠준 밀가루를 받아들고 산을 넘어 거제면 명진리 남정마을 하천변에 조성된 피란민 집단 거주지에 정착했다. 이 마을 주민은 "정착 초기에 하천변에 살던 문 대통령 부모는 이후 신 모씨가 방을 내줘 살았고 농사일 등을 도와주며 어렵게 생계를 이었다"고 전했다. "집주인 신씨네와 문 대통령 모친의 출산 시점이 비슷하자 집주인이 재앙 다툼을 피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인근 배 모씨 집에 가서 문 대통령을 낳도록 했다. 따라서 배 모씨 집이 진짜 대통령 생가"라고 했다. 2017년 문 대통령 당선 이후 생가 인근에 투기가 일면서 생가 땅(73평)은 시골인데도 3억원 이상을 부른다고 마을 주민이 전했다.
사실 거제에는 이 밖에도 평화와 안보 관광 콘텐트가 풍부하다. 흥남철수 당시 빅토리호에서 다섯명의 아이가 태어나 '김치 시리즈'로 불린다. '김치 파이브' 이경필(71) 장승포 가축병원 원장은 "거제 포로수용소 유족공원 옆에 있는 흥남철수 작전기념공원을 2024년까지 거제여객터미널 부지로 옮겨 새로 단장하면 거제 관광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거제 토박이 옥영태(67)씨는 이렇게 호소했다. "거제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첫 승전고(옥포대첩)를 울린 호국의 시발점입니다. 오스카 쉰들러가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 1100여명을 구했다면, 흥남철수 작전으로 민간인 10만명을 구했고 18만 5000명의 전쟁 포로를 받았습니다. 거제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은 산업보국도 실천했어요. 거제(巨濟) 지명처럼 크게 세 번 나라를 구했으니 두 분의 대통령을 배출한 거제 경제를 이제는 국가가 좀 살려주이소."
정갑근 거제수협 외포 어촌계장의 바람처럼 김염삼 전 대통령 생가가 있는 장목면 외포항에 거제의 대표적 명물 대구가 돌아오듯 거제 경제가 다시 황금빛 호황을 맞을 수 있을까. 거제를 둘러싼 바다를 바라본다. 북동쪽은 이순신의 옥포대첩 무대다. 북서쪽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 현장이다. 이순신 리더십을 배울 것인가, 원균의 전철을 따를 것인가. 거제 시민과 국민이 선택해야 한다. 제대로 된 리더십이 거제를 살리고, 나아가 대한민국을 살릴 것이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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