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일까 현실일까? 접두사'K'
웹툰 내려온다
미국 대형 서점 진열대에서 영어로 번역돼 〈세일러 문〉, 〈원피스〉와 나란히 꽂힌 한국만화(김강원의 〈여왕의 기사〉였다)를 보고 감동에 휩싸인 적 있다. 한국만화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짐작도 못했던 2000년 초반의 일이다. 출판 만화가 대웹툰 시대로 전환되는 격변기는 이미 모두가 목격한 바. 컬러 채색과 마우스 스크롤에 이어 모바일 버전과 유료화에 재빨리 적응하고, 네이버와 다음이라는 두 공룡의 부지런한 견인에 힘입은 한국 웹툰은 빠르게 세상을 점령 중이다. 여기에서 ‘점령’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웹툰 시장의 잠재 규모를 100조 원으로 평가하고 있다거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히트 전에도 이미 글로벌 누적 조회수 12억 회를 기록한 〈스위트홈〉 같은 특정 사례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2013년 일본에 자사 서비스인 ‘라인 망가’를 출시한 데 이어 2014년 영어와 대만어로 글로벌 웹툰 서비스를 출시한 네이버웹툰은 지난해 미국 웹툰 지적재산권 전용 플랫폼인 ‘웹툰 스튜디오’를 세웠다. 2016년 카카오 재팬이 출시한 만화 플랫폼 ‘픽코마’는 지난여름 일본에서 처음으로 비게임 앱 매출 1위를 기록했는데, 전체 거래액의 40% 이상을 견인하는 것은 4만 편의 연재작 중 1%에 불과한 웹툰이다. 2020년 기준 네이버웹툰의 연간 거래액은 약 8000억 원, 다음(카카오페이지)은 5000억 원에 달한다. 200여 편이 넘는 한국 웹툰을 영어로 선보이며 2019년 미국 내 유료 결제액만 100억 원을 달성한 레진코믹스 같은 번외 주자도 빼놓을 수 없다.
오랫동안 한국만화를 좋아해온 팬으로서 ‘K웹툰’의 세계적인 활약보다 다양성과 자생 가능성이 훨씬 반갑다. 2020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 시상식에서 거대 플랫폼의 웹툰을 제치고 수상한 고사리박사의 〈극락왕생〉은 연재 간격도, 회당 결제액도 작가가 정하는 오픈 만화 플랫폼 ‘딜리헙’에 연재된 작품이다. ‘누군가 허락한 콘텐츠만이 세상에 나오는 시스템’에 의문을 갖고 SNS에 연재한 〈며느라기〉의 수신지 작가 또한 차기작 〈곤〉의 연재 플랫폼으로 딜리헙을 택했다. 한국 콘텐츠를 익숙하게 보고 자란 지금의 작가들은 한국 전통 요소를 작품에 녹이는 것 또한 스스럼이 없다. ‘산군’ 호랑이가 등장하는 〈호랑이 형님〉, 구전 설화를 바탕으로 한 〈바리공주〉, 토지신과 동자승이 어우러지는 〈어둠이 걷힌 자리엔〉 여성국극을 다룬 〈정년이〉…. 〈극락왕생〉 또한 불교미술을 공부한 작가가 한국 대승불교의 세계관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도깨비와 이무기, 관음보살과 범이 칸칸이 내려왔다. 이 만화들은 또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이마루(피처 에디터, 〈아무튼, 순정만화〉 저자)
어느 K팝의 사연
태초에 K팝의 ‘K’를 정의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모든 시도는 장렬히 실패했다. ‘시작점을 서태지와 아이들로 볼 것이냐, H.O.T로 볼 것이냐’ 같은 기본적인 논의조차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빌보드를 넘어 그래미까지 접수한 방탄소년단이라는 대어를 등에 업은 K팝은 다소 어영부영한 상태로 2021년을 맞이했다.
그나마 느슨하게 도달한 합의점 정도는 있었다. K팝의 ‘K’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시청각 요소를 무기로 삼은 유례없는 룰 브레이커의 비밀스러운 암호명이었다. 법칙은 곳곳에서 깨졌다. 한국 대중음악이라고 해서 한국 리스너만 대상으로 하라는 법은 없었다. 특정 해외 시장에서의 높은 인기가 역수입되며 본토에서의 재평가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았다. 작곡가의 국적을 따지는 건 무의미해진 지 오래. K팝 부흥 초창기 시절 그룹에 ‘세련된 느낌’을 주기 위해 기용되었던 교포는 이제 세계 각국의 멤버들로 가용 범위를 넓혔다. SM의 웨이션브이(WayV)나 JYP의 니쥬(NiziU)처럼 현지 시장을 중심으로 K팝의 틀과 형식만 가져간 응용편도 속속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K팝의 가장 ‘한국적인’ 면이란 오히려 시스템 속에서 발견된다. 재능 있는 새싹을 최대한 어린 나이에 발굴해 긴 트레이닝 기간을 거치는 연습생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엘리트 체육인 양성 코스와도 흡사한 이 한국 특유의 시스템은 데뷔와 동시에 무대 위아래에서 프로페셔널한 모습만 보여야 하며, 짧은 전성기 동안 살인적인 스케줄과 과도한 대중의 시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야 하는 아이돌의 생활을 견디기 위한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나마 인기가 일정 궤도에 오른 그룹의 경우에 한하는 예라는 사실이 더없이 슬프다.
이쯤에서 생각한다. 10억 뷰가 넘는 뮤직비디오를 몇 개나 보유한 블랙핑크가 한복을 입고, 방탄소년단이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춤을 춘다고 이것이 K팝의 K이자 한국의 얼과 흥이 될 수는 없다고. 최소한 지금, K팝의 가장 K한 부분은 산업의 어두운 부분에서 온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타국의 문화를 성기게 수용하며 유발되는 문화적 전유 현상, 고강도 노동과 무차별적 노출로 인한 아티스트의 정신 건강 및 산업 종사자들의 인권 문제 등. 한편 가장 밝은 신호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입과 몸을 통해 온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는 여성 그룹들의 서사, 수많은 말줄임표를 숨긴 선미의 “난 살 거야(〈달리는 사이〉)”라는 말이 남긴 울림. 이 움직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화에 앞장선 K팝의 K가 계속 ‘멋지고 쿨’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윤하(음악 칼럼니스트)
‘K예능’ 시대는 올 것인가
한국의 콘텐츠는 충분히 글로벌하다. 〈대장금〉과 〈겨울연가〉로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K드라마는 아시아 시장에서 그 위상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했다. 그간 한국 방송 콘텐츠의 한계는 줄곧 시장의 크기에 있었다. 내수 시장이 세분화된 타깃을 공략할 만한 가능성과 다양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인구 1억 명은 돼야 한다는 것이 오래된 견해. 그러니 5000만 명에 겨우 턱걸이했다가 하락세를 겪은 한국시장에서는 ‘대박’이 보장되지 않으면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흔히 ‘CJ 감성’으로 희화화되는 블록버스터영화들이 익숙한 공식을 따르는 것도, 뭐 하나 떴다 싶으면 아류가 쏟아져 나오는 방송가의 풍경도 모두 시장 크기의 한계가 낳은 결과다.
각국 방송사를 통한 기존 판매 체계에는 분명히 존재해 왔던 한계가 글로벌 OTT 시대를 맞아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넷플릭스에 콘텐츠가 등록되면 시차도 없이 전 세계에서 소비된다. 온전히 ‘한국 콘텐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제외해도 〈사이코지만 괜찮아〉 〈이태원 클라쓰〉 〈사랑의 불시착〉 같은 드라마들이 아시아 시장 전반에서 시청률 1, 2위를 다투며 충분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시장은 한국의 콘텐츠 제작자에게 분명 기회의 땅이다. 심지어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웰메이드 콘텐츠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상태. 유럽과 미국 제작사들의 전면 제작 중단이 줄줄이 이어지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팬데믹 위기에 잘 대처 중인 아시아 시장으로 시선이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다. 장기적으로는 국내 제작 역량이 해외자본에 잠식되는 것을 우려해야 하지만, 당분간 이 활기를 즐겨도 좋지 않을까.
다만 예능 PD로서 ‘픽션’인 드라마에 비해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예능 프로그램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과 서바이벌 쇼 혹은 리얼리티 쇼 같은 ‘포맷 예능’은 매뉴얼대로 제작되고, 연출자의 재량이 반영될 여지가 적다. 때문에 한국처럼 PD가 기획자이자 연출자로서 유연하게 만들어내는 예능 프로그램은 세계적으로 극히 드물다. 사실 ‘예능’을 번역할 영어 단어조차 애매하다. ‘TV Show’로 번역되거나 ‘Non-scripted(대본 없는)’로 불릴 뿐. 그만큼 세계적으로 희귀한 형태의 한국 예능 프로그램은 ‘포맷 시장’에서도 인기가 없다. 매뉴얼대로 만들 수 있는 ‘포맷’을 원하는 해외시장의 수요에 딱 들어맞은 프로그램이 바로 〈복면가왕〉이나 〈런닝맨〉이다. 국내 방송시장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연출자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제작이 가능한 ‘포맷 예능’ 프로그램의 비중이 커지는 추세다. 동시에 한국 콘텐츠에 대한 높아진 관심이 언제 한국만의 완성도 높은 독특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권성민(카카오TV PD)
‘K푸드’는 어디에나 있다
얼마 전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K푸드 수출 지표는 제목부터 화려하다. ‘2020년 농식품 수출액 역대 최고인 75억7000달러 달성!’ 그중 김치는 무려 1억4450만 달러(약 1584억 원)어치를 팔았다. 전년대비 37.6%나 증가한 데는 비건 김치, 캔 김치 등 동시대적 제품을 잘 기획한 덕이다. 영화 〈기생충〉 덕분일까? 라면도 기록 경신이다. 전년대비 29.3% 늘어난 6억 달러(약 6575억 원)를 기록했다.
‘K푸드’ 전에는 ‘한식 세계화’라는 단어가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당시 국가 정책으로 벌인 사업명이다. 추문의 역사로 남아버렸지만 2010년대부터 국가가 품은 사업적 야심은 짐작할 만하다. 지금 정권도 마찬가지다. 비빔밥과 불고기에서 시작해 K-BBQ 그리고 떡볶이로 명맥을 이어가며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층위의 한식을 시연하고 맛보였다. 개중엔 뉴욕 도심을 도배한 홍보물에 실린 ‘로맨틱한 버섯(Romantic Mushroom)’ 문구처럼 비웃음거리가 된 사례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등 번듯한 국제 음식 행사에서 한식을 홍보한 것은 꽤 유효한 전략이었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의 등장 이후 ‘미쉐린 스타’라는 알기 쉬운 네임 밸류를 얻은 한국 파인 다이닝 요리사들의 해외 초청 빈도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국 드라마와 아이돌의 세계적 흥행에 힘입어 전 세계 ‘집밥’에서도 한식에 대한 접근이 활발해졌다. 캐주얼 다이닝과 가정식에서도 한식 코드가 자연스럽게 넓고 깊게 확산됐고, 그 결과 ‘K푸드’도 용어로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한식에 접근하는 통행권을 가진 지구 반대편 유튜버에게 방금 전에 본 짜파구리나 비비고 만두, 도시락 컵라면을 당장 야식으로 먹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그러나 ‘K푸드 무브먼트’의 경로가 이렇게 틀어진 데는 코로나19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각지 대도시들의 봉쇄가 없었다면, 외식이 가능했다면, 해외 왕래가 가능했다면 K푸드의 세력 확장은 최근 1년 새 더 빠르거나 넓지 않았을까? 최소한 파인 다이닝 시장에서 한식은 코로나19 탓에 큰 기회를 잃은 건 분명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동안 오로지 랜선만이 통로가 돼 그토록 외쳤던 한식의 미래나 이상보다 일상의 현실 쪽이 K푸드의 본질이 됐지만 어쩌겠나. 이 기세가 잦아들지 않기만을 바라며 다음 기회를 기다릴 뿐이다. 이해림(푸드 칼럼니스트, 푸드 콘텐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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