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⑯] '신미양요', 잘못 한번 따져보자
신미양요 당시 미 함대를 지휘한 로저스 제독은 당시 조선 정부가 협상 과정 중임에도 불구하고, 미 함대에 사전 예고 없이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로저스 제독이 미 해군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조선의 미 함대 공격은 신의를 저버린 행위이며, 이에 대한 정당한 보복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미 해병대와 미 함대는 강화도 해안 포대를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미국의 조선 원정은 1866년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이 벌어진 직후부터 수차례 시도됐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됐다. 미국의 조선 원정 목적은 조선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 데 있었다. 미국이 조선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통상 조약은 미국이 동북아시아 국가들과 교역할 때 항로 중간에 위치한 국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였다. 1866년 5월 ‘서프라이즈 호’의 사례처럼 표류한 선원이 무사히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제너럴 셔먼 호 사건’처럼 생존자를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통상 조약을 통해 이러한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국 등 동북아시아 국가와 교류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운송료를 비롯한 각종 비용의 증가로 직결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1867년 르장드르가 타이완 원주민과 맺은 약속처럼 조선과의 통상 조약을 통해 미국 선박의 안전을 공식적으로 보장받고자 했다.
또한 조선은 동북아시아 국가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시장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유럽 국가가 선점한 상황이라서 후발 국가인 미국이 이들을 상대로 경쟁력을 갖기는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조선과 통상 조약을 체결해 시장을 선점하려는 의도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1871년 로저스 제독의 아시아 함대를 동원하여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은 단독으로 조선 원정을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예산 절감 등을 이유로 군축을 진행했고, 당연히 아시아 함대 역시 감축되었다. 원래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총 8척으로 편성되었지만, 1869년 초에 실질적으로 운용 가능한 군함은 1척뿐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함대 중 일부를 미국에 복귀시키거나, 예산 절감을 위해 다른 국가에 군함을 판매한 상태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4척 중 3척은 사실상 운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어 일본 요코하마 등에 방치된 상태였다.
때문에 미국은 제너럴 셔먼 호 사건 직후 프랑스에 공동 출병을 요청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국은 단독으로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기로 결정하고, 1869년에 추가로 군함 4척을 미 동부에서 출발시켰다. 4척의 미 함대는 수천 킬로를 항해하여 아시아 함대에 합류했다. 미 정부는 로저스 제독을 지휘관으로 삼아 5척의 군함과 미 해병대로 구성된 원정대를 편성했다.
미 아시아 함대는 일본 나가사키에 집결한 뒤 5월 15일 출발했다. 조선 연안에 도착한 직후 조선 관리로 보이는 사람이 문서로 온 목적과 국적 등을 질문했지만, 로저스 제독은 조선 측 인사의 직위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와 직접 교섭하기 위해 서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강 입구를 찾아 계속 항해했고, 5월 30일에는 강화도 인근의 호도에 정박했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대화를 요청했다. 로저스 제독은 그들을 배로 초청해, 자신들이 미국 정부에서 보낸 함대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조선과의 통상 교섭이 목적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교섭을 원하며, 조선 측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어떠한 무력 행사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31일에도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도착하였지만, 이들에게는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협상은 진행되지 못했다.
로저스 제독은 이들에게 추가적인 협상의 진행과 함께 미 군함이 한강을 이용하는 것, 측량을 비롯한 일부 병력의 상륙을 조선 측이 방해하지 않을 것(no molestation)을 희망한다고 전달했다. 그리고 관련 내용을 24시간 이내 한강변의 조선인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에 대해 조선 측 관리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우호적인 관계가 계속되기를 기대한다고 전달했다.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와 서울에서 교섭이 진행될 것으로 여기고, 조선에서 염하라고 부르는 곳부터 시작하여 한강의 해로를 측량하도록 원정대를 보냈다.
하지만 손돌목 인근에서 조선군은 측량 중이던 미 함대에 기습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측량 중이던 미 함대에서도 이에 대응 사격을 가했다. 불의의 조선 측 공격으로 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그 외 별다른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가 미 함대를 불시에 공격한 것은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로서, 이에 대해 조선 정부가 10일 이내에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요구에 불응할 경우 정당한 보복으로서 무력 행사를 하겠다고 조선 정부에 통고했다. 로저스 제독은 이러한 내용을 미 해군장관에게 보고하고, 예고대로 10일 후인 6월 10일 오전 10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로저스 제독의 보고에는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우선, 미국 측이 요구한 내용을 24시간 이내 한강변의 조선인에게 통고하도록 요구한 것은 과연 가능한 요구였을까? 보고에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어떠한 권한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 관리를 상대로 로저스 제독은 사실상 조선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어쩌면 로저스 제독은 당시 서울에서 강화도까지 전신이 연결되어 미국이 요구한 내용을 허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요구를 전달받은 관리가 부지런히 서울까지 이동하여 관련 내용을 허가받은 이후 한강변의 조선군에게 대응하지 말라고 전달하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로저스 제독은 보고서에서 자신들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제작한 지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로저스 제독은 권한이 없는 조선 관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면서, 이마저도 제대로 보고할 수 있는 시간조차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고는 조선과의 약속에 따라 평화롭게 해로를 측량했는데, 조선이 신의를 저버리고 불시에 공격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음은 개전 당시 상황이다. 미 해군은 조선 측으로부터 불시에 공격을 받은 장소가 손돌목에 이르렀을 때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손돌목 너머는 갑곶진으로 조선에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다. 미군은 이를 몰랐을까?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군의 해도에도 잘 나와 있는 내용이다.
더욱이 손돌목 이전에 위치한 조선군 다른 진의 태도 역시 미군의 주장에 의문을 품게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지진과 덕진진은 손돌목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왜 미 군함을 공격하지 않고 순순히 보내줬을까? 미군 보고에 따르면 최초 교전 이후 미 군함은 손돌목의 급류로 좌초하면서 선체 일부가 파손되어 제대로 항해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이 때문에 철수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미군 측 기록에서도 이 과정에서 다른 진지, 특히 초지진 등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초지진과 덕진진 등에 조선군이 배치되지 않았거나, 애초부터 초지진 등에는 미 군함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 즉 대포 등이 없어서라고 가정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가정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결국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냥 보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미군은 최초 교전 당시 강안에 위치한 조선군이 15분간 강력한 공격을 가했지만, 방향이 잘못되어 별 효과가 없었다고 보고했다. 강폭이 불과 600미터밖에 안되는 손돌목에서, 더욱이 강화도와 김포에서 손돌목을 포위 공격할 수 있도록 양안에 남장포대와 덕포포대를 배치한 조선군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미 군함을 상대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격하여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이다. 그런 조선군이 미 군함의 대응 사격 이후에는 갑자기 제대로 사격하기 시작하여 미 군함에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여기서도 몇 가지 가정을 할 수 있다. 첫째는 손돌목 주변에 배치된 조선군이 사격을 하면서 점차 미 군함을 제대로 조준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는 처음에는 경고 사격이었는데, 미 군함이 대응 사격을 하면서 염하 양안에 배치된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개인적 의견이지만 후자가 좀더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미 해군은 조선군의 경고를 공격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여러 가지 추정과 의문은 당연히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당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 함대는 조선 측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항을, 절대 이행할 수 없는 시간 내에 이행하라고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는 당연히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1871년 강화도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미군의 충돌은 예견된 것일 수도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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