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전신 청년공작대, 34명 청년들이 이뤄낸 반향
[장호철 기자]
▲ 위펑산에서 내려다본 류저우(柳州)시 전경. 임정은 이 도시에서 다섯 달가량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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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우리는 광저우 남역에서 고속열차를 탔다. 5년 만의 방문이지만, 그새 중국의 모습은 5년 전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첫 방문에서는 무심하게 중국을 바라보기만 했다면, 이번엔 뭐라고 할까, 보이는 것 너머가 언뜻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슬그머니 기가 죽는 기분이었다.
우선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시장경제가 떠받치는 이 나라의 규모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로도 비기지 못할 듯한 큰 규모의 도시가 그랬고, 광저우 남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14억명 나라라는 사실을 환기하곤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 규모가 해명되진 않았다. 상상 너머의 덩치가 드러내는 게 이 거대국가의 저력이라는 사실을, 꼼짝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십 년 만에 선진국이 걸어온 몇백 년의 길을 걸었다"는 세계 최장 3만 5000km의 방대한 노선망을 자랑하는 중국의 고속철은 광저우에서 류저우까지 500Km를 네 시간 만에 주파했다. 땅거미가 내리는 류저우역에서, 나는 82년 전 임정의 피난길이 현실적으로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
광저우 떠난 지 42일 만에 류저우 도착
임시정부(임정) 요인과 가족들이 광저우의 포산(佛山)을 떠난 때는 1938년 10월 19일이었다. 이튿날 싼수이(三水)에 닿은 임정 식구들이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로 향하면서 육로 대신 수로를 선택한 것은 도로 사정 때문이었다. 임정은 목선을 빌려 주강(珠江)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 뱃길 여행은 고생이 자심했다.
싼수이에서 출발해 여드레 만에 우저우(梧州)와 류저우 중간에 있는 도시 구이핑(桂平)에 닿았는데, 거기서 다시 길을 떠난 것은 20일 뒤였다. 동력선을 앞에 묶었지만, 배는 하루 고작 2, 30리 정도에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정정화의 <장강(長江)일기>)가 류저우에 이른 것은 11월 30일이었으니, 광저우 포산을 떠난 지 42일 만이었다.
▲ 류저우의 류허우(柳候) 공원에 서 있는 유종원의 동상. 류저우는 유종원은 4년간 류저우를 다스리면서 류저우의 경제와 문화를 일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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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1900~1991, 1982 애족장)는 <장강일기>에서 류저우를 송나라의 문장가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유배지'로 유명한 도시라고 썼지만, 유종원은 유배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만년에 장안을 떠나 유주 자사(刺史)로 좌천되어 4년간 류저우를 다스린 것이다.
당시엔 '남만(南蠻)의 땅'이었던 류저우에 부임한 유종원은 민정을 살펴 행정을 바로잡고, 유교 문화를 전파하고 노비를 해방하는 등 이른바 '선정'을 베풀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등 그의 시정은 류저우의 경제와 문화를 일신했다. 류저우의 류허우(柳候)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서 있고 류저우 박물관에 별도의 기념 공간이 마련된 이유다.
충칭 가는 차편 기다리며 머문 다섯 달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류저우에서 각각 분산된 주거지에 머물렀다. 주거지는 1932년에 류저우를 지키면서 류허우 공원을 새롭게 정비한 군벌 랴오레이(廖磊)가 지은 공관을 비롯한 여러 곳이었다. 주거를 하나로 모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역시 류저우엔 잠시 머물렀다 갈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류저우 시기 청사로 썼던 러춴서(낙군사 樂群社). 지금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 진열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우리가 찾았을 땐 문을 닫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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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군사 건너편의 호찌민 구거. 임정이 떠나고 난 낙군사에 1943년 호찌민은 베트남혁명동맹회 사무실을 두고 활동했다. 오른쪽 아래는 전시된 호찌민의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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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항일투쟁 활동 진열관 1층은 임정 요인들이 활동하고 휴식하는 모습의 모형을 전시했고, 2층은 상하이, 류저우, 충칭 시기의 임정 활동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꾸며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우리가 들렀을 때는 진열관은 문을 닫고 있었다.
건물 모퉁이의 진열관 출입구가 아닌 오른쪽 중앙에 있는 출입구 벽면에는 안내판에는 '호찌민(胡志明) 구거(舊居)' 아래 괄호 안에 '낙군사 구거'라고 적혀 있었다. 임정이 류저우를 떠난 뒤, 1943년 당시 베트남 독립운동을 준비했던 호찌민이 1년간 여기 머물면서 베트남혁명동맹회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호찌민 구거는 낙군사 맞은편 2층 건물에 전시관을 열고 있었다. 전시관에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를 남기고 떠난, 인민으로부터 '호 아저씨'라 불린 이 혁명가의 깡마른 사진을 만날 수 있다. 불과 몇 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이 이 도시에 머무른 사실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를 새롭게 환기해 주는 듯했다.
광복군 전신인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결성
중일전쟁 당시에 국민당 정부 공군기지가 있었던 류저우에도 일본의 공습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군의 폭격은 마치 생활의 일부가 된 듯 이어져 요인과 가족들은 낙군사 인근 위펑산(魚蜂山)의 천연동굴로 대피하곤 했다. 정정화는 "막상 가보니 제법 살기가 좋은 고장이었다. 기후도 온화하고 물산도 풍요한 듯했다"(장강일기)라고 했지만, 중국 군사시설이 집중된 류저우에선 공습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임정이 한인 독립운동단체의 분산적 활동을 청산하고, 이를 통합하여 혁명역량을 결집하고자 한 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좌파 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전선연맹)을 창립과 이를 실행하고자 한 조직인 조선의용대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국민당 정부는 당장에 항일전에 참여할 군사력으로 조선의용대를 주목하고 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장교로 구성된 의용대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데다가 황푸군교 출신의 중국군 고위 간부들이 황푸 동문인 김원봉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항일전쟁의 새 국면을 열어나갈 만한 마땅한 활로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결성된 조직이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였다. 1939년 2월, 류저우 시내 류허우 공원에 모여서 운동을 함께하던 청년들이 모인 청년공작대는 직접 전투를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는 활동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 류허우 공원 음악당 앞에서 청년공작대 대원들이 류저우 각 기관 단체 대표들과 찍은 기념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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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장으로 선임된 고운기와 여성대원들. 오광심만 기혼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10대 소녀였지만 공작대에서 제 몫을 다했다. |
ⓒ 보훈처 등 |
청년공작대원 34명 가운데 여성 대원도 11명 있었다. 광복군(1940) 총사령을 지낸 지청천 장군(1962년 대통령장)의 딸인 지복영(1990 애국장)을 비롯하여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1962 독립장)의 부인인 오광심(1977 독립장), 서로군정서 오광선(1962 독립장)의 두 딸 오희영·오희옥(1990 애족장) 외에 독립운동가의 부인들이었다. 지복영과 오희영·희옥 자매는 당시 10대 소녀였다.
무대장치와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타고 흐르는 한풍에 눈송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베리아 국경선의 철조망과 초병들의 보루가 진짜를 방불케 했다. 무대를 꾸미기 위해 청년공작대원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 공연이 끝난 뒤 중한의 동지들이 함께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든 순간, 온몸에 감동의 물결이 번져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중한 민족이여 연합하라! 중한 민족 해방 만세!
- <유저우(柳州)일보>(1939.3.5.)
충칭으로 가는 도중 뜻하지 않게 머물게 된 류저우에서 청년공작대의 활동은 임정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비록 선전 활동에 그치기는 했지만, 피난처에서 이뤄진 위문 공연 등의 활동은 임정의 조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한중 양국의 항일전쟁에서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환기한 것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충칭 가는 '만리장정'...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백범이 여러 차례 당국과 교섭하여 간신히 차량 6대와 여비를 지원받게 된 것은 류저우에 발이 묶인 지 다섯 달 만인 1939년 4월 초순이었다. 국민당 정부에서 보내준 버스로 임정과 식구들은 구이저우성(貴州省) 성도인 구이양(貴陽)을 거쳐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나 7년여 떠돌아야 했던 임정 가족들은 자신들의 피난길을 '만리장정(長征)'이라 불렀다. 그것은 비록 1만 리에 그치지만,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370일 동안 12,500km를 걸어 옌안(延安)으로 탈출한 중국공산당 홍군(紅軍)의 장정(長征)에 비길 만한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다고 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⑩] 치장(綦江)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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