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었다" 화가 임옥상

이은주 2021. 2. 1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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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나우 '나는 나무다'전
임옥상, 홍매와 춤추다, 112x 168cm,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2020. [사진 갤러리나우]
임옥상, 무대, 84x112cm, 캔버스에 흙, 백토, 먹, 2021. [사진 갤러리나우]
임옥상, 세 나무, 3점 각 72.6x33.4cm, 캔버스에 흙, 먹, 혼합재료, 2021. [사진 갤러리나우]

흙, 바람, 나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열리고 있는 화가 임옥상(71)의 전시를 요약한다면 이 세 단어로 충분할 듯하다. 오로지 나무 그림만 선보이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나는 나무다'이다. 그런데 정작 전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임옥상의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흙과 바람이 나무와 엉켜 하나가 돼 있는 풍경들이다. 그의 나무는 흙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때 되면 어김없이 꽃피우고 잎을 떨구고, 가시같은 맨 몸으로 겨울을 견뎌내는 존재, 생명력 그 자체다.

임옥상은 평생 '민중미술가 1세대'로 불렸다.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현실과 발언'의 창립 멤버였고, 조각·설치 등 장르를 넘나들며 꾸준하게 사회참여 목소리를 내왔다. 2017년 개인전에선 촛불 집회의 모습을 장대한 파노라마로 담은 초대형 회화 '광장에, 서'를 선보였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기념비적인 역사기록화”라고 평한 이 그림은 전시가 끝난 뒤 청와대 본관에 전시돼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이번엔 나무뿐이다. 크고 작은 캔버스에 매화나무부터 은행나무, 느티나무와 팽나무를 한그루씩 담았다. 서너점을 빼놓고는 모두 지난해 완성한 신작이다. 공책 만한 크기( 33x24.5㎝)에 일기를 쓰듯 나무 한그루를 그려넣은 60개의 캔버스로 완성한 나무 연작이 있는가 하면 극과 극의 형상으로 성균관 명륜당의 은행나무를 그린 작품도 있다. 눈부신 황금단풍을 보석처럼 휘감은 모습도, 몸서리쳐질 듯이 바스락거리는 가지투성이의 나무도 있다.

임옥상의 '나는 나무다' 전시장 전경. [사진 갤러리나우]
임옥상, 봄날은 간다, 181x 518cm(2pc), 캔버스에 흙, 아크릴릭, 2019. [사진 갤러리나우]

'흙의 예술가'라고 불릴 정도로 흙을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해온 임옥상은 2017년 개인전부터 캔버스에 흙을 발라 그린 작품을 선보였다. 이른바 습식과 건식을 결합한 기법이다. 캔버스에 흙을 바르고, 다 마르기 전 물기를 머금은 흙 캔버스에 한 번에 큰 붓으로 흙을 밀어내며 나무를 새기듯이 그린다. 그리고 흙이 충분히 마른 뒤엔 날카롭고 삐죽한 가지와 꽃을 그려 넣는다. 그런데 그림 바탕으로 쓰는 흙은 쉽게 마르고 터지거나 부스러지는 것이 문제. 오랜 시도 끝에 그는 나중에 흙이 말라도 균열이 생기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

임옥상과 나무 그림과의 인연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원(서울대 회화과)을 졸업할 때까지 추상화를 그리던 그가 1976년 구상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할 때 처음 그린 나무가 고향의 당산나무였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해온 나무를 보며 나무처럼 살고 싶었다"는 그는 몇 년 뒤 태어난 딸의 이름을 '나무'라고 지었다. 그리고 『사기(史記)』에 나오는 시구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복숭아와 자두는 꽃이 곱고 열매가 맛이 좋아 오라고 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그 나무 밑에는 길이 저절로 생긴다는 뜻이다.

그는 "살아오며 심신이 지칠 때면 종종 나무를 그려왔지만, 이번에 '나는 한 그루의 나무다' 생각하며 그렸다"고 했다. 처음으로 나무 중심으로 생각하며 그렸다는 것. "그동안 나무를 저의 표상처럼, 삶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용쓰는 모습으로 그렸다면 이번엔 좀더 나무 입장이 되고자 했다. 바람 불면 바람에 춤을 추고, 비와 눈에 자유롭게 몸을 맡기는 모습에 집중했다. 나무를 자연 그 자체로 드러내고 싶었다."

임옥상, 은행나무, 2021-1, 90.5x 60.5cm, 캔버스에 흙, 먹, 아크릴릭, 2020. [사진 갤러리나우]
[사진 갤러리나우]
[사진 갤러리나우]

그에게 '민중미술가'라는 타이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엄혹한 시절 그것은 내게 '사상이 불온한 자'라는 족쇄이기도 했고, 작가로선 영광스럽고 부끄러운 타이틀이기도 했다. 후엔 미술계에서 예외적이고 이질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로 분류되는 꼬리표가 됐다"고 털어놨다. 이어 "프레임 안에 갇히는 것은 싫다. 미술은 유연해야 하고 끊임없이 확장돼야 한다. 나는 여전히 미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작가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임옥상에게 흙과 나무, 바람은 이음동의어다. "나무는 수직으로 선 생명의 대지이며, 바람은 대지의 들숨날숨 호흡"이다. 그는 "흙으로 작업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요즘 나는 흙이 다시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닌가 다시 의심하며 경계하고 있다"며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가두지 않는 것, 나로부터의 자유"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28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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