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 칼럼] 사회주의적인 모든 것에 대한 성찰
하지만 기업 초과수익 재원 삼아
나눠주자는 '이익공유제'는 곤란
'시장경제'의 국가 원칙 지켜져야
선의로 시작했을 터다. 최근 정치권에서 추진 중인 ‘이익공유제’ 얘기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 돈 좀 번 기업들의 재원으로 방역 통제에 고통받는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을 도와주자는 논리다. 이뿐이 아니다. 나눠줄 돈의 출처가 기업이냐, 국채·세금 등의 재정이냐가 다를 뿐 ‘협력이익공유법’이나 ‘손실보상법’ ‘사회연대기금법’ ‘재난연대목적세’ 등의 법제화가 봇물을 이룬다. 이 세기적 재난의 피해자들을 공동체가 최대한 ‘지원’하자는 데 이의가 없다. 전혀. 그러나 넘지 말아야 할 선(線)만은 있다. 국가라는 계약공동체의 원칙 때문이다. 지원의 논리와 방법? 그 역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적이어야 한다.
여러 우려에 권력은 당장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저급한 색깔론”(홍익표 민주당 정책위의장)이라고 몰아붙인다. “개혁엔 저항세력이 있기 마련”이라며 선과 악의 흑백 구도로 다시 덫을 놓고 있다. “이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냐”며 주저하는 기재부에 치도곤을 안기거나 “민간의 상부상조가 필요하다”는 단순 논리도 들린다. 상부상조라…. 그리 간단한 ‘미덕’으로 끝나는 문제일까.
평등 분배가 최우선인 모든 사회주의적인 것들의 속성을 되짚어 보자. 처음엔 선의로 시작했을 터다. 산업혁명기 처참한 미숙련, 여성·아동 노동 환경에의 분노가 출발이라고 치자. ‘약속의 낙원’이란 꿈에서였다 치자. 그러나 왜 계획, 통제된 평등이란 다 실패로 끝났을까.
사회주의적인 것들은 계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유재산권이 없고, 생산의 사적 수단도 공유하자는 게 사회주의다. 생산의 요소들이 서로 매매될 수 없으니 각각의 시장 가격이 없다. 가격이 없으니 계산할 수가 없다. 그러니 평등의 가슴 벅찬 계획이란 늘 공허한 신기루로 스러질 뿐이다. 과연 누가 누구를 계획하고,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고, 누가 누구의 삶의 지위를 배분하는가. 존 스튜어트 밀은 “몇 사람의 즐거움과 판단에 따라 누구에겐 더 주고, 누구는 손해보게 하는 것은 그들이 초인간적 존재라 믿지 않는 한 결코 용인될 수 없다”(『정치경제학의 원칙들』)고 정리한다.
사회주의적인 것의 또 다른 오류는 생산 과정보다 그 결과로 덩그러니 남은 소득에만 달라붙어 나누려는 속성이다. “늘 정의롭게”를 외치면서. 사회주의 비판에 전념한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결론이 이렇다. “생산과 분배 사이의 내적 연결이 없어 사회주의는 반드시 실패한다”(『사회주의』). ‘이익공유제’에 대한 최근 산업 현장의 반론들이 이를 입증한다. “초과 이익의 요인들인 제품 경쟁력, 생산원가 절감, R&D 투자 노력, 마케팅 역량, 업황, 세계 경기, 수요의 변화, 환율 등의 복잡한 도식과 코로나 특수라는 인과관계를 누가 어떻게 도출할 것인가.” 아파트 생산이 빵 만드는 것처럼 쉽지 않은 걸 몰랐다는 한 장관의 고백이 떠오른다. 더구나 생산의 요소인 자본을 댄 주주들의 동의 없이 그 수익을 자의적으로 처분한다니. “정당한 배당을 박탈하는 사유재산권 침해”란 반론이 필연적이다. 그것도 국내외에서. 우리 민법도 “공유자는 다른 공유자의 동의 없이 공유물을 처분·변경하지 못한다”고 공동소유의 룰을 규정하고 있다.
공정한 배분? 한층 어렵다. 분배 원칙의 네 가지는 ▶1인당 평등한 ▶공동체에 기여한 서비스에 따른 ▶필요에 따른 ▶실적에 따른 나눔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피해의 계산 역시 결코 공정·정확할 수 없다. 그 머리 좋다는 기재부조차 세 차례 재난지원금의 정밀 계산에 실패, “전부 똑같이”로 손들고 말았다. 대상이 늘면 액수가, 대상이 줄면 더 많은 이가 발끈한다. 인간의 나태와 도덕적 해이는 계산이 가능한 것일까? 공정한 분배? 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공상(空想)이다. 경영자·기업가를 경원시하는 것 역시 사회주의적 속성이다. 레닌의 말대로라면 “생산과 노동, 분배의 감시와 기록 등 쉬운 일만 하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생충들”이라 했으니. 세금계산서 한번 떼어 보거나, 벌어서 남 월급 한번 준 적이 없던 과거 운동권 출신 권력자들이 현대적 기업가의 생산 혁신 기여를 이해는 하고 있을까…. 기업징벌적 입법들은 왜 양산되는 걸까.
‘파괴’의 동반 역시 사회주의적인 속성이다. 계산해 보면 엉터리인 걸 금세들 알아채니 선동·구호로 단숨에 몰아가야 한다. 걸림돌이 될 여론과 언론? ‘개혁’ ‘가짜뉴스’란 이름으로 징벌한다. 거수기 입법부에, 섬뜩한 두려움들이 있어야 하니 검찰·사법부 장악은 필수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평등’이란 단어 하나를 빼면 공통점이 전혀 없다”(알렉시스 토크빌)는 말은 그래서 진실이다.
코로나에 고통받는 이들. 한껏, 더 한껏 도와주자. 그 이유는 사회안전망 내에서 그들의 소득·소비가 유지되고 생존해야 그들의 자유·인권이 보호되고, 투자·생산과 국가경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바로 민주주의·시장경제의 원리다. 어떤 명분이든 ‘이익 공유’류의 사회주의적 의심을 받는 길은 곤란하다. “수요와 공급이 결정하는 시장이야말로 한푼 한푼이 투표할 권리를 갖는 민주주의”(『노예의 길』)라는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의 말이 바로 정답이다.
최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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