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잇따른 아동학대 비극 막으려면 지자체가 나서야
복지행정 시스템 오작동 고쳐야
자녀 체벌 근거로 여겼던 민법 915조의 체벌권을 오랜 세월 방치하는 바람에 한국 사회가 급기야 ‘정인이 사건’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최근에도 10세 여아 ‘물고문’ 사건 등 죄 없는 어린 생명을 앗아간 ‘제2의 정인이 사건’ 들이 줄줄이 터지고 있다.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든 아동 학대와 살인 사건이 잇따르면서 아이들의 죽음은 많은 부모와 아이들에게 직·간접으로 정신적 외상을 입히고 있다. 특히 ‘정인이 사건’의 경우 입양아 문제가 아닌 아동 학대 문제로 접근하는 게 맞다. 그런 관점에서 ‘양모(養母)’란 단어 대신 ‘가해자 장모씨’라고 지칭하길 제안한다. 정인이가 숨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가해자의 행위뿐 아니라 몇 차례 살릴 수 있었던 아이를 죽게 한 허술한 아동 보호 시스템과 국가의 책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8~2019년 가정학대로 사망한 아동은 70명이나 된다. 이들 중 절반이 넘는 40명은 학대 주체가 친생 부모였다. 최근 정부 자료를 보면 하루 평균 50명의 아동이 학대를 받고 있고, 매월 2.6명의 아동이 학대로 사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2015년까지 해외 입양아동이 17만명이나 된다. 1990년 중반까지 ‘아기 수출 대국’이란 오명이 따라붙었다. 90년대 중반 국외 입양 중단을 발표하자 1999년 이후 국외 입양은 대폭 줄었다. 그러나 보호 대상 아동 중 아직도 입양이나 위탁가정에서 생활하는 아동은 극히 소수다. 2019년 가정을 떠나 보호조치 된 아동 수는 4000여 명인데, 입양특례법에 의해 입양된 경우는 104명에 불과하다. 동시에 사회적 방임 현상도 심각하다. 국내 입양을 더 장려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의 아동정책은 사회정책 중 가장 낙후한 실정이다. 아동을 사회적 권리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문화적 미성숙과 아동 문제를 성인 중심 시각으로 보는 폐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9년 7월 ‘아동권리보장원’을 설립했다. ‘포용 국가 아동정책’이란 구호 아래 모처럼 국제적 기준을 들여와 아동보호권을 우선시하며 아동의 인권·참여권·놀이권·건강권까지 근사하게 나열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본질은 입법이 아니라 현장에서 행정력이 제대로 집행되느냐에 달렸다.
그런데 열거된 아동의 권리를 지켜주고 책임져줄 정부 부서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아동·청소년·가족정책 주무부처가 이원화돼 있고, 지방자치단체의 복지 행정은 이와 같은 사회 서비스를 다룰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 아동 보호와 학대 예방을 위한 공적 책임 단위는 지자체가 돼야 한다. 지자체는 유엔 아동권리 협약상 ‘아동 이익 우선(Best Interests of the Child)’을 고려하는 효율적 복지시스템 구축을 지방행정의 가장 중요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 이에 필요한 예산권과 전문성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아동학대 신고처가 경찰이 아니라 관련 지자체 아동보호 부서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지자체는 누구나 신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춰야 하며, 비밀유지와 전문성을 갖춘 논의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아동 문제의 경우 육체적·심리적 진단 능력을 갖춰야 하며, 위급 시 위탁가정 마련과 경찰력 동원까지를 이 구조 속에 하나로 연계되는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한다. 이 업무를 주도할 전담 인력 확보는 말할 것도 없다.
아동학대 사건은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 제도와 구조의 문제에서 바라봐야 하는데 가해자에 대한 처벌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정인이 사건’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형사사건이지만, 본질은 사회복지 시스템의 부재에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행정체계의 오작동에서 근본 대책을 찾아야 한다.
신필균 복지국가여성연대 대표·사무금융 ‘우분투’ 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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