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방역하면서 할 일은 해야
염치나 부끄러움 실종된 정치
미나리 생명력처럼 이겨낼 것
다섯 명 이상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면 과태료를 물린다는 희한한 설을 보냈습니다. 설날, 제가 사는 아파트는 평일보다 더 조용하였습니다.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눈길도 느껴졌습니다. 징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서로를 감시하는 분위기입니다. 시댁을 신고한 며느리와 아파트 위층을 신고한 아래층 주민 등 설날 집합금지 위반 신고가 2200건을 넘었습니다. 이러다가 ‘코파라치’까지 등장할 법합니다.
그 대신 국내선 공항이 모처럼 호황을 이루고 제주도와 강원도 등의 관광지·놀이공원은 인파로 넘쳐났다는 보도를 보며 어떤 것이 참 방역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호텔서 설 연휴를 보낸 가족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설날 당일만이라도 자식이 부모를 찾는 정도는 허용하는 것이 합리적 행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관광지나 호텔에서 복작댄 설이 그렇게 즐거웠을까요?
1년 이상 가족과 면회도 되지 않는 요양병원은 한계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가족이건 간병인이건 일단 요양병원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고, 외부 가족은 대면이 안되니 격리 상황이 코로나만큼 무섭습니다. 방역 조치를 하고 자녀와 부모가 만나게 해주는 배려가 없었습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모처럼 모인 가족 친지끼리 나누는 대화에 정치적 화제가 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설날 민심, 추석 민심 같은 말이 생겼습니다. 이번 설까지 이렇게 틀어막으니 방역은 이해하면서도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말들도 떠돌고 있습니다. 설 지나고 다행히 사회적 거리두기는 완화됐지만 직계가족 외의 5인 이상 모임 금지는 계속됩니다. 이런 분위기가 4월 보궐선거까지 이어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올 한해 계속될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도 나옵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에 부모도 못 찾는 상황인데 여당 예비후보들은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끌어안고 시장통 군중 속에 모여 어묵 파티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야당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했습니다. 표에만 관심이 있지, 염치나 부끄러움은 실종된 정치입니다.
1919년 무오년 스페인 독감때 당시 국내 인구의 거의 절반이 감염되고 14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나오는 가운데서도 조상들은 3·1 독립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전염병이 돌아도 우리는 방역하면서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음력설은 일제 강점기에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신정을 일본사람 설, 구정을 조선사람 설이라고 했으니 설 쇠기가 일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인의 귀소본능은 유명합니다. 설이나 추석이면 고속도로 정체가 연례행사처럼 치러졌습니다. 길에서 날밤을 새우더라도 찾아가 뵈어야 하는 부모였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차례상에서 절하며 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진정한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살아계시건 돌아가셨건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의 정체성 지키기도 유명하지요. 몇 년 전 상해를 방문했을 때, 한족(漢族)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를 떠나 왔다면서 찾아뵙지 못함을 슬퍼하는 연변 출신 중국 교포 젊은 여성을 보았습니다.
세계 각종 영화상을 휩쓸고 있는 ‘미나리’에 미국에 이민 온 딸을 도와주러 온 어머니가 나옵니다. 엄마는 고춧가루와 멸치를 잔뜩 싸안고 와 딸을 눈물짓게 합니다. 손자와 한방을 쓰게 되자 “여기서는 할머니랑 같이 방 쓰는 것 싫어한다던데···”라고 망설입니다. 그러자 딸이 “얘는 미국에서 살아도 한국애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진짜 할머니가 하는 할머니 연기라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지니고 온 삶은 밤을 이로 깨물어 먹으라고 손자에게 줍니다. 손주들에게 화투를 가르쳐 같이 치며 좋아합니다. 이 영화는 “모든 우리의 할머니들께(To All our grandmas)”라는 헌사로 끝납니다. 이런 한국인의 모습이 세계인의 공감을 샀을 것입니다.
영화 ‘미나리’는 한국인 이민 1세가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일어서는 한인 이민자들의 생명력을 미나리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상징화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수천 년 우리의 명절마저 무력화시켰습니다. 전 국민에게 단체 기합을 줘도 꼼짝 못 하고 순응합니다. 이런 희생마저 감수한 힘으로 우리는 이 싸움에서 기필코 이길 것입니다. 끈질긴 미나리의 생명력처럼….
유자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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