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만든 재야의 '민중 후보' 백기완[1932~2021.2.15]

오현석 2021. 2. 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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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90년대 민주화·통일운동 앞장
87·92년 '민중 후보'로 대선 출마
"문정부서도 노점상 죽어가" 비판
정의당 "이젠 누가 회초리 돼주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자이자 민주화·통일운동에 앞장섰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89세를 일기로 2월 15일 별세했다.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이어온 고인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과거 정치 활동은 ‘민중 후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독자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1987년 대선에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기호 8번 후보였던 고인은 1987년 12월 3일 “민주연립정부안(案)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며 양김(兩金) 후보에 단일화를 공식 제안했다.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자 1987년 12월 14일 “단일화 실패 책임을 내가 지고 물러가겠다”며 후보직을 사퇴했다.

백 소장은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이후 열린 1992년 대선에선 끝까지 완주했다. 결과는 23만표(1%) 득표였다. 당시 고인이 내세웠던 ‘민중 후보론’은 19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30만표·1.2% 득표)의 완주와 민주노동당 창당을 거쳐 현재 정의당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날 정의당에서는 “(고인은) 대통령선거에 독자 민중 후보로 출마하심으로써 진보정치의 지평을 열기도 하셨다”(황순식 비상대책위원)는 평가가 나왔다.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 모자란 우리들에게 누가 회초리가 되어주실까요”라고 썼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영면했다. 사진은 1992년 시위 도중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 1주기 추모식 참석 모습. [사진 통일문제연구소]

생전 재야 출신 정치인들과도 관계가 깊었다. 1973년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벌였던 ‘유신헌법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직후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개최했던 ‘대통령 간접선거반대 국민총궐기대회’ 사건(일명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 등 굵직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85년 3월 결성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서울 의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민통련에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임채정 전 국회의장,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 등이 참여했다. 민주화청년연합을 이끌었던 고(故)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도 민통련 창립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고인은 한·미 FTA 반대 운동, 용산 참사 규탄 집회 등 시위 현장에 꾸준히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7년 7월엔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노점상은 죽어가고 있다. 다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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