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야 실력향상" 체육계 일상화된 폭력, 또래학폭 대물림
피해자 39% "분발해야겠다 생각"
학생 선수 15% "신체폭력 경험"
피해자 80%는 쉬쉬 "보복 두려워"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좀 때려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게 없으면 성적 내기가 힘들죠.”(고등학생 남자 야구선수)
“선배들도 이렇게 했으니까 저희도 이제 그냥 자연스럽게 되더라고요. 운동하는 사람들은 처맞아야지 정신을 차립니다.”(중학생 남자 양궁선수)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초·중·고등학교의 학생 선수 6만여 명을 전수조사했을 당시 나온 답변 중 일부다. 최근 여자 프로배구 이재영·다영(25) 쌍둥이 자매가 저지른 학교폭력의 폭로를 계기로 운동선수들의 과거 학폭 전력이 조명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일선 학교에선 선수들이 폭력에 노출돼 있고, 피해자들조차 이를 당연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권위가 전국 5274개 초·중·고 선수 6만3211명을 대상으로 인권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14.7%(8440명)가 코치나 선배로부터 신체 폭력을 경험했다. 폭언이나 욕설·협박 등 언어 폭력도 15.7%(9035명)를 차지했으며, 초·중·고 학생 선수 중 초등학생의 피해 사례가 가장 많았다. 신체 폭력은 학년이 높아질수록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고등학생의 피해 사례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피해 학생 대다수는 돌아올 보복이 두렵거나 대처 방법을 몰라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신체 폭력을 당한 학생 선수 중 응답자의 79.6%(4898명)는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거나 신고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보복이 두려워서’(24.5%), ‘대처 방법을 몰라서’(13%)를 많이 꼽았다.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로부터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 역시 “10년이나 지난 일이라 잊고 살까도 생각해봤다”면서 “그때의 기억이 스치면서 자신을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 내서 쓴다”며 자신이 당했던 학교폭력 사실을 뒤늦게 알렸다.
정혜원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학교 운동부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합숙훈련을 하고 단체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폭력이나 통제에 순응하거나 자신 역시 폭력의 가해자로 역할하게 되는 이른바 폭력의 사회화 과정이 이뤄지기가 쉽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인권위가 진행한 전수조사에서 초등학교 학생 선수들은 신체 폭력을 경험한 뒤 감정을 묻는 말에 응답자의 38.7%(898명)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함”이라고 답했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인권위는 “일상화된 폭력 문화 속에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미 폭력을 훈련이나 실력 향상을 위한 필요악으로 인식한다”며 “이러한 폭력의 내면화는 운동 집단 내 폭력 문화가 지속, 재생산되는 악순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전문가들은 체육계의 폭력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선 엘리트 중심의 체육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아무리 반인륜적인 행동을 해도 경기 실적이 좋으면 용서되고, 금메달을 따면 모든 면죄부가 주어지는 이른바 엘리트 스포츠의 관행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팀 에이스에 대한 눈치 보기와 지도자의 묵인 아래 폭력이 광범위하게 이뤄져 왔고, 지금 드러난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말했다. 정혜원 연구위원은 “학교 운동부는 군대와 같은 위계와 서열, 권력과 통제, 복종의 규범이 작동하는 집단적 특성을 지니기 쉽다”며 “안전하고 차별 없이 운동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코치들의 노력이 필요한 만큼 이에 대한 교육법이 제대로 전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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