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닌 미국 증시로 간 쿠팡..차등의결권 논쟁 불붙였다
#.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와 중국판 아마존으로 불리는 ‘징둥닷컴’, 중국의 안랩으로 알려진 ‘치후360’.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중국 기업이지만 모두 미국 나스닥에 상장돼있다.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차등의결권 주식을 보유한 기업이라는 점이다. 차등의결권 주식이란 1주에 2개 이상 의결권을 갖는 주식으로, ‘복수의결권’ 주식으로도 불린다. 대규모 투자를 받더라도 지분율 희석을 막아 경영권을 지킬 수 있는 장치다.
바이두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리옌훙 회장은 15.9%의 지분이 있지만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53.5%다. 치후 360의 주요 경영진도 보유한 지분(40.4%)보다 의결권(64.9%)이 더 많다. 징둥닷컴의 창업자 류창둥 회장 역시 20.7% 지분으로 83.7%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이들 기업이 나스닥에 상장할 당시 중국에는 차등의결권 제도가 없었다. 중국은 2019년에 차등의결권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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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의 뉴욕행으로 다시 불붙은 차등의결권
쿠팡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행을 선택하면서 ‘차등의결권’ 논란에 다시 불을 붙였다. 쿠팡은 지난 12일 한국이 아닌 미국 증시 상장을 선언했다. 쿠팡은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 보유하는 클래스B 주식에 대해 1주당 29배의 의결권을 부여했다. 김 의장이 지분 2%만 보유해도 주주총회에서는 지분율 58% 수준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를 택한 주요 이유로 꼽힌다. 한국에선 차등의결권이 허용되지 않는다. 상법 제369조 ‘의결권은 1주마다 1개로 한다’는 규정에 따라서다.
외국에선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추세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덴마크, 아일랜드, 헝가리 등 유럽 국가가 대표적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도 차등의결권을 활용한다. 일본에선 일정 수의 주식에 의결권을 부여하는 단원주제도가 있다. 홍콩과 싱가포르,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도 2018년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대열에 합류했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는 이에 따라 2014년 뉴욕증시에 이어 2019년 홍콩거래소에 2차 상장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도 나섰다. 정부는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지난해 말 정부입법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비상장 벤처기업의 창업주에 한해 1주당 의결권을 10개까지 부여하는 내용이다. 존속 기간은 최대 10년, 기업이 상장하거나 해당 주식을 상속·양도할 경우엔 보통주로 전환하도록 했다.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영 국민의힘 의원도 비슷한 내용의 벤처기업법 개정안을 내놨다. 이 의원 안은 의결권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차등의결권을 허용할 경우 무능한 경영자를 교체하기 어렵고 경영진이 소수의 지분으로 회사를 장악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은 지난 2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몰염치하고 노골적인 친재벌 입법”이라고 반대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도 “장기적으로 재벌 세습의 제도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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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증시 문턱 넘을 순 있지만, 성장잠재력 논란
쿠팡이 미국행을 택한 속내는 좀 더 복잡하다. 쿠팡은 10년 연속 적자에 2017년 자본잠식까지 경험했다. 누적 적자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41억1800만 달러에 이른다. 현재 한국거래소는 코스피 상장을 위한 요건으로 경영성과와 성장성을 꼽고 있다. 경영성과 요건은 최근 연간 매출액이 1000억원(3년 평균 700억원) 이상이어야 하고, 최근 사업연도 세전 이익 30억원(3년 합계 60억원) 등을 충족해야 한다.
2015년 11월 도입한 성장성 요건 기준은 ▶시가총액 2000억원ㆍ매출액 1000억원▶시가총액 6000억원ㆍ자기자본 2000억원▶시가총액 2000억원·순이익 50억원 중 하나를 충족하면 된다. 쿠팡은 경영성과 요건을 충족하지 않지만, 시가총액이나 매출액 카드를 꺼내 들면 성장성 요건을 충족해 국내 증시 상장 문턱을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쿠팡의 성장성은 국내에서는 논란이 있다. 국내 이커머스 시장의 규모와 성장성의 한계에 대한 논란이기도 하다. 현재 국내 이커머스 시장의 침투율은 34%로, 일부에서는 이미 50%까지 높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이커머스 침투율은 전체 소비 지출에서 이커머스(인터넷, 온라인쇼핑 등)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침투율 비중이 높을수록 시장이 성숙했다는 의미로, 경쟁은 치열하되 성장 잠재력은 낮다는 의미다.
김진우 KT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쿠팡은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만 집중하고 해외 시장 진출 계획은 없다"며 "특히 규모가 작은 국내 시장만 공략하고 있어 아마존 등과 성장 잠재력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아마존은 미국에서 이커머스 시장 침투율이 1.7%에 불과하던 2003년에 이미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쿠팡은 국내 이커머스시장 침투율이 50%에 달하지만, 아직 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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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닥 대신 NYSE행?…흑자 전환 ‘자신감’
쿠팡의 뉴욕증권거래소(NYSE) 직행에 업계는 적잖이 놀란 눈치다. 지난달엔 나스닥 예비심사를 통과했다는 외신 보도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나스닥은 당장의 손익보다는 기업의 기술과 미래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아마존과 애플, 페이스북 등도 모두 나스닥 상장사다. 시장에선 10년 내내 적자를 기록한 쿠팡으로선 당연히 나스닥을 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쿠팡이 뉴욕행을 택한 건 나스닥보다 대규모 투자 유치가 수월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쿠팡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등을 통해 총 34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 중 30억 달러를 투자한 손 회장이 지난해 투자금 회수 계획을 밝히면서 쿠팡에는 비상이 걸렸다. 물류센터 등 투자를 계속해야 하는데 추가 투자 유치가 불투명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기가 수월하고 ‘해외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이커머스’라는 상징성을 갖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높은 기업가치를 받을 수 있다는 쿠팡의 자신감도 엿보인다. 쿠팡은 지난해 영업손실 58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방역비용 5000억원을 지출한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손익분기점(BEP)을 달성한 셈이다. 유승우 SK증권 애널리스트는 “쿠팡은 지난해 7월 개시한 로켓제휴 서비스를 통해 아마존의 풀필먼트서비스(FBA)를 유사하게 구현하게 됐다”며 “물류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커진 고정비를 커버할 수 있는 유익한 서비스로, 이를 통해 흑자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분석했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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