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사자머리 휘날리며.. 혁명가는 살아있다
통일운동의 거목,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2021년 2월 15일 새벽에 영면했다. 향년 89세이다. '불쌈꾼', '거리의 백발 투사'로 불린 고인의 한평생은 격동의 현대사 그 자체였다. 고 백기완 소장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이었으며, 오마이북에서 그의 마지막 저서인 <두 어른> <버선발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고인의 격동적인 삶과 노나메기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독재정권 시절의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 거리로 나가 통일과 해방을 외쳤던 '불쌈군 백기완'의 삶을 5회에 걸쳐 재조명했다. 이 기사는 마지막회다. <편집자말>
[김병기 기자]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이윤엽 판화의 작품 |
ⓒ 이윤엽 |
[여섯째 마당] "죽음은 뜻을 저버렸을 때… 죽어서도 다시 사는 삶"
2018년 들어서는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했지만 투쟁도 계속됐다. 4월 9일 심혈관질환으로 긴급 입원했고, 12시간에 걸친 관상동맥우회술을 했다. 퇴원 후 4달간 요양과 회복에 전념하면서 우리 민중사상의 원형이요 뿌리인 <버선발 이야기> 집필에 매진했다. 하지만 10월 폐렴으로 재입원했다.
퇴원한 뒤인 11월 29일 전태일문화예술한바탕 공연에 나섰고, 장기투쟁사업장의 하나인 파인텍 굴뚝 고공농성 해결을 위해 사회원로 시국선언을 제안해 노사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한몫했다.
병환 중인 2019년에는 정리해고로 13년간 길거리에서 싸우는 콜트콜텍 끝장 투쟁에 참여했다. 24살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사람 잡는 비정규직 전면 폐기하라'는 시민사회원로 기자회견, 50일째 단식을 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던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를 땅으로 이재용은 감옥으로!, 문재인 정권이 앞장서서 이 원통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내용의 사회원로 회견을 주도했다. 공무원노조,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촉구를 위한 전국 시민사회원로 기자회견등 장기투쟁 사업장 문제 해결에도 앞장섰다.
그해 3월 백기완의 마지막 책이 출간됐다. 10여년 만에 나온 <버선발 이야기>였다.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에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보태서 민중의 예술과 노나메기 사상을 담은 소설이다. 한자어와 영어 표현은 하나도 쓰지 않은 순 우리말 책으로 민중사상의 정수를 전했다. 민중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사적 서사시이자 민중정서를 담은 서정시였다.
"민중은 글을 몰랐기에 기록이 없어. 내가 버선발(벗은 발의 우리말)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은 것처럼, 말로 전해오는 것밖에 없다고. 전 세계를 통틀어 민중사상이나 문화를 기록한 건 거의 없어. 인류 역사는 민중을 죽인 역사야. 이것을 서술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진짜 사람이 가져야 할 희망의 실체, 민중의 역사적 실체를 기록하고 싶었어. 민중사상의 원형이 버선발이야."
백발 투사는 9월부터 긴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고문 후유증에 폐렴까지 악화됐다. 그 뒤부터 싸움의 현장에 나설 수 없었다. 백발 투사의 몸은 병원 중환자실과 응급실, 일반 병상을 오가며 한시도 쉬지 않고 민중해방을 위해 치달려왔던 삶의 무게를 하나둘씩 내려놓았다. 하지만 수없이 죽음을 넘나들면서 가슴속에 새겼던 뜻과 희망조차 내려놓은 건 아니었다.
▲ 2015년, 여든세 살.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백기완 |
ⓒ 이정용 |
울보
거리에서는 불굴의 백발투사였지만, 백기완은 울보였다. 군중 앞에 서면 독재정권과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을 이어갔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와 잠시 쉴 때면 죽어간 열사와 노동자들의 이름을 한명씩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백기완은 거리에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얼굴을 붉히면서 호통을 치곤했다. "쓸데 없는 질문을 던진다"면서 인터뷰를 하러 온 언론인을 문밖으로 내쫓았다. 가까운 지인들과 댓거리를 하다가도 수틀리면 "야! 이놈 내쫓아!" "너 이 새끼! 그런 썩은 정신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럴 때 백기완은 성내지 않고 분노했다. 화내지 않고 거친 욕도 퍼부었다. 독재정권과 세상을 향해 내지르던 외침과는 결이 다른 분노였다. 함께 투쟁의 거리에 나서기 위해 동지애를 끊임없이 달구자는 매질이었고, 투쟁 전선에 함께 서서 노나메기 세상을 일구자는 백발 노인의 애절한 몸짓이기도 했다.
백기완은 온몸으로 시를 썼다. 마주 앉으면 자작시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들의 시를 줄줄이 읊었다. 평소 말을 할 때에도 직설과 비유, 하다못해 운율까지 맞춰가면서 시적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백기완은 시낭송회를 열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시는 몽땅 글로 되어 있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글을 몰랐는데, 시심도 없었을까? 3천 년 전에 우리나라 글은 한문이었는데 1천 명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이 하나둘밖에 없었어. 2천 년 전에는 한 열명쯤 되었겠지. 그렇다면 글을 아는 사람들만 시심을 구사하였을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렁이들도 시적 감흥과 시적 정서를 갖고 살았다, 이 말이야.
그 사람들이 빚었던 시를 일러서 비나리라고 말해. 비나리는 글이 아니라 입으로 해.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말해. 이걸 보고 '말림'이라고 해. 비나리의 뼈대는 '달구질'과 '을러대기'야. 글을 아는 사람들이 쓰는 것은 시(詩)고, 글을 모르는 사람이 웅얼대는 것을 비나리라고 그래. 시는 대부분 달, 꽃과 같은 자연을 읊조리는 넋두리야.
그런데 글을 모르고 가진 것이라곤 자기 알통밖에 없는 무지렁이들에게 진짜 시는 '달구질'과 '을러대기'야. 달구질은 아무리 살기 어려워도 기죽지 말라고 자기를 달구는 것이고, 을러대기는 그 깐 일로 기죽지 말자 이거야, 나가 싸우라고 옆에서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야."
백기완은 노래도 즐겼다. 거리에서 불렀던 노래는 분노의 표현이자 투쟁의 의지를 다잡는 으르렁거림이었다. 잠시 쉴 때는 민중 정서가 담긴 타령조의 서글픈 옛 유행가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동요를 부르며 지친 육신을 달랬다. 또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다가도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흥을 돋웠다.
▲ 2013년, 여든한 살. 민중비나리 |
ⓒ 정택용 |
백기완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한겨울 가루눈이 지향없이 내리는 깊은 밤, 주린 속은 쓰리고 옛이야기는 달리고 화로의 불길마저 시들어가는 밤이면 울타리 너머 수수밭을 달리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스산했다. 이럴 때면 할머니는 백두산 준령을 넘나드는 독립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저 바람소리는 독립군의 말달리는 소리라고. 왜놈 병정을 쥐잡듯이하고 멧돼지 피로 허기를 달래고 산불에 의해 녹아내리는 얼음물로 목욕을 할 정도로 무쇠덩어리인 아, 신화 같은 우리 독립군. 이때 나도 이 다음에 크면 독립군이 될 거라며 웃통을 벗고 으쓱대면 그때서야 증조할머니는 옷을 화로불에 쬐여 목화마냥 하얗게 슨 이를 잡곤 하셨다"
-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서문 중에서
백기완은 구전동화로 널리 알려질 만한 옛이야기를 노래와 시, 그리고 거친 표현을 버무려서 구수하게 전한 천상의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그냥 전한 게 아니라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형식 그대로, 음정의 고저와 장단을 맞춰가면서 댓거리를 했다. 눈물을 흘리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호통을 치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눈에 힘을 주고 상대방을 노려보거나, 한동안 목을 추스르면서 침묵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 또한 수만 년 동안 이어져온 민중들의 이야기 형식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민중 사상의 원형이 녹아있었다.
"뿔로살이 이야기를 해줄게. 누렁소는 뿔로 산다, 이 말이야! 핏대로 산다, 그 말이지! 주인 놈은 낮잠만 자고 누렁소는 더워 죽겠는데 등짝을 때리면서 밭을 갈라고 하니까 코뚜레를 끊어버리고는 주인 놈을 받아버렸어. 그러니 배알이 쫙 나왔는데 그걸 뿔에 걸고는 자기가 가고 싶은 풀밭으로 간 거야.
거기가 진짜 자기 태어난 고장이거든.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먹고 잠을 자는데, 웬 놈이 와서 무쇠로 풀밭을 갈아엎어 버렸어. 그래서 그 무쇠를 먹어버렸어. 얼마 있다가 웬놈이 풀밭에 불을 질러서 그 불을 먹어버리니 어떻게 되었겠어. 어떻게 되긴. 아주마루(영원히)로 죽질 않는 천하의 힘꾼 뿔로살이가 된 거지."
백기완은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것"이라고 말한 문화혁명가이기도 했고, 탁월한 민중사상가이기도 했다. 만악의 근원인 사적소유와 독점을 넘어서는 '바랄'을 꿈꾸기도 했다.
"희망과 꿈이라는 말이 있지. 변증법적으로 하나로 만든 낱말이 있는데 그걸 '바랄'이라고 불러. 꿈을 꾸던 놈은 목숨을 걸고 노력하고 싸우지 않으면 죽어. 기운이 빠진 것은 그 바랄이 뭔지 몰라서 그래. 두 번째로 인류 문화, 땅별 지구가 망하는 건 돈이 주인이 돼서 그래.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돈의 똘마니가 됐잖아.
셋째는 땅별 어느 구석에 내 것 네 것 아닌 게 있나? 유식한 말로 사적소유지. 갈기갈기 찢어져서 내 것 네 것의 식민지가 됐어. 이걸 바로잡으려면, 책? 경전? 필요 없어. 싸움의 현장에서 이론적인 모순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싸움의 과정에서 사람의 인품이 모자라다는 것을 깨우쳐야 하는 거야.
▲ 창경궁, 늙고 마른 백기완. 그가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
ⓒ 채원희 |
백기완은 춤도 좋아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든 그는 춤을 출 수는 없었다. 대신 눈과 입으로 춤을 췄다.
"눈으로도 말할 수 있어. 춤 중에서 제일 어려운 춤은 눈깔 춤이야. 눈알 굴리는 게 춤의 기본이라니까! 서양의 미학 이론에는 없지만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이걸 잘 알아. 춤을 제대로 추는 사람들은 눈깔 춤을 잘 춰. 눈웃음이라고 말하면 알겠지? 묘한 웃음이지.
가난한 집에서 말이요. 눈은 펄펄 내릴 때 동치미 국물도 다 떨어지고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쳐. 그때 엄마가 돌아서서 눈물만 닦는 게 아니야. 뒤로 돌아서면서 결심하는 게 있어. 내일 아침에는 머리카락을 잘라서 부잣집에라도 주고 쌀을 가져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야겠다.
그 결단을 내릴 때 엄마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띠거든. 이건 입춤이야. 그런 결단을 내렸을 때에 눈에도 뜨겁고 짠 게 맺히잖아. 눈이 웃으면서도 울음이고 웃으면서도 분노야. 이 세 개가 합쳐져야 비나리가 나와. 그러니까 말림은 온몸으로 시를 빚고 온몸으로 시를 발표하는 것이지. 말림은 비나리를 발표하는 형식이고 내용이고 실제야."
백기완은 또한 '찬우물'이었다.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염원이 아로새겨진 자연현상이 있었는데 찬우물, 찬샘이야. 물이 콸콸 끊임없이 솟아 나와 둘레의 땅을 기름지게 해. 그리고 찬샘은 그걸 '내거'라고 하질 않아. 피곤하다고 하지도 않아.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사람의 염원이다, 그거야."
그의 입에서는 서정과 서사를 씨줄 날줄로 엮은 수많은 민중들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이야기가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거리에 서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독재·독점 권력의 등골을 서늘케 했지만, 때로는 우물에서 막 퍼온 샘물을 온몸에 끼얹듯이, 머뭇거리는 대중들의 온몸에 민중 사상의 정수를 쏟아 부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그는 마르지 않는 이 시대의 찬우물이자 온몸으로 행동하는 시대의 버팀목이자 스승이었다. 한국의 왜곡된 근대를 온몸으로 깨부수고 평화, 평등의 진정한 새 시대로 나아가고자 한살매를 투신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혁명가요 사상가였다.
▲ 여든다섯 살, 청년 백기완 |
ⓒ 정택용 |
'불쌈꾼', '거리의 백발투사'이자 시인이며 민중사상가였던 백기완의 삶은 숨가쁘게 내달려 온 격동의 현대사 그 자체였다. 백기완은 쉬지 않고 혁명과 반동의 거센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들어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죽음의 형장과 같았던 고문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시 전선으로 달려가 쌍도끼(입으론 선동연설과 두 주먹으로는 역사 반동을 갈라친다는 데에서 얻은 별명)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채찍을 휘둘렀다. 마지막 투병에 들어가기 전에도 지팡이를 들고 숨을 몰아쉬면서 투쟁의 거리 맨 앞에 섰다.
놀다보니 다 가버렸어/ 산천도 사람도 다 가버렸어// 제 가족 먹여 살린답시고/ 바쁜 체 돌아다니다 보니/ 빈 하늘 쳐다보며 쫓아다니다 보니/ 꽃 지고 해 지고 남은 건 그림자 뿐// 가 버렸어/ 그 많은 시간 다 가 버렸어/ 50년 세월 어디론가 다 가 버렸어/ 이래서 한잔 저래서 한잔/ 먹을 것 입을 것/ 그런 것에나 신경 쓰고 살다보니/ 아, 다 가버렸어 알맹이는 다 가 버렸어/ 통일은 언제 되느냐/ 조국통일은 과연 언제쯤 오느냐// 북녘/ 내 어머니시여/ 놀다 놀다/ 세월 다 보낸 이 아들을/ 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로/ 반쯤 죽여주소서 죽여주옵소서
평소 '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로/ 반쯤 죽여주소서 죽여주옵소서'가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고 했다. 백기완은 매일 이 시를 보면서 한살매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서도 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을 휘두르며 통일을 염원했다.
민중의 영원한 벗이자 통일꾼이었던 백기완. 그는 이제 더이상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노나메기재단설립추진위원회)의 문을 열 수 없지만, 그가 꿈꾸었던 통일의 문은 아직도 열려있다. 눈은 감았지만, 서릿발같이 성성한 그 눈빛은 아직도 살아있다.
육신은 이제 한 줌 거름으로 땅에 묻혔지만, 독재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민중민주 참세상을 함께 꿈꾸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그의 혼은 지금도 빈민해방, 노동해방, 통일해방, 민중해방 세상을 열망하는 거리에서 백발의 사자머리를 휘날리며 목 놓아 외치고 있다.
한살매(평생)를 구월산 장산곶매처럼 목숨 아닌 것과 맞싸우기 위해 거리에서 멱치기를 해온 백기완.
"죽음의 깎아지른 벼랑, 장산곶에서 새로 태어난 새내기 뻘떡이(장산곶매)는 싸나운 발톱과 부리로 쩨쩨하게 시리 무언가 제 먹거리나 얻는 데 쓰지를 않았어. 둘레의 사냥이나 해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멱치기를 떠나는 거야. 멱치기란 목숨 아닌 것과 맞싸워 참목숨을 일구는 싸움이야.
한 해에 딱 두 번 멱치기를 떠나가기 전날 밤엔 제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려고 밤새 제 둥지를 딱, 딱 하고 까부쉈어. 왜 그랬을까. 멱치기는 목숨을 건 싸움인데 한번 떠나면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말라는 거야. 그리하여 하늘 높이 떠올라서도 캄캄한 밤하늘에 대고 딱~ 하고 까면 별이 하나가 반짝, 또 한 번 딱~ 하고 까면 또 하나의 별이 반짝.
그 별들이 아뿔싸 길 잃은 모든 목숨들의 길라잡이가 되는 거라. 오늘도 한낮인데도 캄캄하기만 한 저 밤하늘을 보란 말이다. 딱, 딱 부리질 소리와 함께 별이 반짝, 또 하나 별이 반짝. 그렇다, 장산곶매는 이참도 끝없이 딱, 딱 부리질을 하며 오늘도 내일도 한없이 가고 있어."
▲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오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별세했다. 이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유가족인 장녀 백원담 교수가 기자회견을 하며 고인의 책자를 꼭 안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백기완, 영면]
① '불쌈꾼 백기완'이 장산곶매 품은 까닭 http://omn.kr/1s2e9
② "오른쪽 귀 옆 날카로운 도끼 자국... 온 몸을 떨었다" http://omn.kr/1s2oh
③ "네 혀로 똥물 핥아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 순간 탄생했다 http://omn.kr/1s2pq
④ 거리투쟁, 강연, 저술... '늙은 투사'는 쉴 수 없었다 http://omn.kr/1s2pr
☞ 고 백기완 소장 추모 누리집 바로가기(클릭) http://baekgiw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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