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쌈꾼 백기완'이 장산곶매 품은 까닭
통일운동의 거목,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2021년 2월 15일 새벽에 영면했다. 향년 89세이다. '불쌈꾼', '거리의 백발 투사'로 불린 고인의 한평생은 격동의 현대사 그 자체였다. 고 백기완 소장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이었으며, 오마이북에서 그의 마지막 저서인 <두 어른> <버선발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고인의 격동적인 삶과 노나메기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독재정권 시절의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 거리로 나가 통일과 해방을 외쳤던 '불쌈군 백기완'의 삶을 5회에 걸쳐 재조명했다. 이 기사는 그 첫번째다. <편집자말>
[김병기 기자]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이윤엽 판화의 작품 |
ⓒ 이윤엽 |
[여는 마당] "소나무 장작은 왜(倭)장작!"
'불쌈꾼'(혁명가) '거리의 백발 투사'였던 백기완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심한 풍화작용으로 기암절벽이 우뚝 선 우리나라 4대 명산의 하나이며 조선 사회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던 의적 임꺽정 활동무대 구월산 자락이다. 사자춤과 양반춤으로 조선 계급사회를 신랄하게 조롱한 은율 탈춤의 본고장이었다.
일제는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강도 높게 한반도 병참기지화를 추진했다. 군사물자를 보급하려고 식량 수탈을 일삼았고, 노동력과 군인을 강제 동원하면서 민족 말살 통치를 자행했다. 일제 암흑기였다.
"소나무 장작은 왜(倭)장작! 떵, 떠엉, 떵딱! 얼쑤~"
평소 백기완은 댓거리를 하다가도 갑자기 타령조의 장단에 맞춰 탁자를 내리치면서 이렇게 외치곤 했다. 이 불림은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 은율 탈춤 제3과장 8목중춤에 들어갈 때 양 팔을 펼치면서 던지는 외마디 소리이다. 당시 민중들의 땔감인 소나무 장작조차 수탈해간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분노의 표현이자 신랄한 풍자였다. 백기완 집안은 은율에서 500년 동안 대를 이으며 살았다.
[첫째 마당] 독립운동으로 500년 가업 풍비박산
백기완은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였다. 장련면 유지였던 할아버지 백태주는 3·1 혁명 때 전깃불도 없는 산골짝에서 5천여 장의 태극기를 제작해 은율 지역에 뿌릴 정도로 민족의식이 높았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백태주는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곤욕을 치렀다.
1898년 백범 김구 선생이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에 복수를 하려고 일본 육군중위를 처단한 뒤 투옥됐던 인천 감리서에서 탈옥했을 때, 할아버지 백태주가 '쇠대접'을 한 일화도 유명하다. 백기완이 태어난 집으로 김구 선생을 피신시키고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보름동안 극진하게 돌봐준 일이다. 일제 감시가 삼엄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 선생을 도운 것이 계기가 돼서 뒷날 백기완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백기완이 태어나기 전인 1922년 장연농민공제회 창립 당시 회장을 맡았다. 1923년에는 이상재 선생 등이 주도했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장련지부 설립에도 참여했다. 일제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홍수·가뭄으로 목표로 한 모금 운동에는 실패했지만 할아버지는 우리 민족이 일제에 동화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교육에 나섰던 지사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백홍렬도 장련청년회 집행위원, 장련청년동맹 검사위원을 지내며 청년운동에 관여했다. 당시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동경 유학을 다녀온 수재였다.
"네 배지만 부르고 네 등만 따시고자 하면 키가 안 커"
결국 할아버지 백태주는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어주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돼 한 달여 동안 고문을 받고 감옥에서 나왔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안돼서 입에서 피를 쏟고 돌아가셨다. 설상가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큰아버지가 감옥에 갇히자 가계는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어린 백기완은 항상 배가 고팠다.
"문을 차고 집에 들어와 '엄마 밥 줘' 하면 고개만 끄덕였어. 솥을 열면 콩국 한 그릇과 강냉이 한 자루뿐이었지. 그걸 홀랑 먹고 배고프다고 어머니를 졸랐어.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어. '야 기완아! 이웃들이 다 어렵게 사는데 네 배지(배)만 부르고 네 등만 따시고자 하면 너 인마, 키가 안 커!' 그 말이 내 일생을 길라잡는 새김말(좌우명)이 돼버렸어. 몸뚱어리 키도 안 크지만 마음의 키도 안 큰다는 말이야. 이 말보다 더 위대한 말이 어디 있어!"
매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이었지만 백기완이 전하는 집안 분위기는 인간적이었다.
"거지를 빌뱅이라고 해. 어릴 때 빌뱅이 가족이 우리 집에 왔어. 밥을 달라고 한 게 아냐. 그때 부엌은 그냥 거적문이었어. 눈보라가 치면 부엌 바닥에 이만큼씩 쌓일 정도야. 빌뱅이 식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어린 꼬마들까지…. 12명이었어.
우리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지. 초가집 단칸방이지만 들어오라고 했는데 안 들어온다는 거야. 대신 실컷 울 수 있는 자리만 달라는 거야. 너무 춥고 배고파서 길거리에서 울 수 없다는 거야. 실컷 울어야 힘이 생길 것 같다는 거야. 정말로 부엌에서 코흘리개들은 배고파서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할아버지는 늙은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냐고 울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금만 참으시라고 말하면서 우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우리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시는 거야. 그 사람들보다 더 슬프게 말이지. 어린 내가 잠이 와? 나도 울었겠지. 그 때부터 나는 조그마한 일이든, 큰일이든 괴롭고 안타까우면 울어. 그래서 내 덧이름(별명)이 울보야. 산다는 게 우는 거 아냐? 사람 죽이는 자본주의 세상 아냐? 내가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민중 이야기
어린 백기완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던 것은 이야기였다. 삯바느질을 했던 어머니, 독립운동을 했던 큰아버지와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어린 백기완을 키웠다.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장산곶매', '이심이', '꼴굿떼' 이야기 속에는 양반 계급의 핍박에 저항해 온 민중혁명의 뜨거운 정서가 넘쳐흘렀다. 훗날 백기완은 이런 이야기에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민중미학, 민중사상이 오롯이 담긴 글과 말을 남겼다.
"나는 아주 몰락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어. 할머니와 어머니가 배고프다고 칭칭대는 나를 달래는 방법이 있었어. 삼태기에 배추꼬리를 담아 와 깎아줬지. 그런데 배추꼬리가 모자랄 만큼 겨울밤이 계속되는 거야. 눈은 내리고 배는 고픈데 밤은 깊어가지. 그럴때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나한테 옛날이야기를 해줬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지만 입으로 눈으로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공자 왈 맹자 왈은 다 기록돼 있고, 소크라테스와 마르크스 이야기도 다 기록돼 있어. 그럼 이건 누가 기록하나? 아무도 안 해."
일제의 수탈은 집요했다. 끼니조차 온데간데없는 집안의 놋그릇과 밥그릇도 빼앗았다. 기와집에서 쫓겨나 초가집으로 이사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문간방으로 옮겼다. 여덟 식구가 한 방에서 살았던 시절, 백기완의 꿈은 '돼지기름 덩어리 한 조박(조각의 황해도 사투리)을 먹는 것'과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돼지 한 마리 잡으면 한 개가 나오는 오줌통 축구공은 어린 백기완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아이들과 함께 새끼줄을 둘둘 말아 만든 공을 차고 놀았다. 맨발로 공을 차다가 오른쪽 엄지발톱이 빠지기도 했다.
1945년 해방 때 백기완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어린 그에게도 8·15 해방은 가슴 벅찬 감격이었다.
"그날, 황해도 구월산 밑 산골동네도 만세 소리로 한바탕 발칵 뒤집혔지. 아버지는 너무나 감격해 덩실덩실 춤을 추시다가 그만 똥통에 빠졌는데도 '덩실덩실', 그걸 본 마을 사람들도 건질 생각은 아니 하고 함께 뛰어들면서 와당탕. 똥통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자유, 해방을 외치며 그야말로 감격이었지."
백기완은 그해 글짓기 시간에 '네 주의 내 주의 다 버리고 새 나라를 위하여 한 뭉치 되자'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글은 학교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이를 계기로 은율 군청 강당에서 '건국을 위하여 한 뭉치 되자'는 제목으로 웅변을 했다. 백발의 갈깃머리를 휘날리며 최루탄과 지랄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사자처럼 포효하는 모습으로 각인된 백기완이 대중 앞에 나선 첫 무대였다.
▲ 1950년, 열여덟 살. 피란길에 올랐던 백기완은 추위를 피해 쓰러져 가는 어느 초라한 집에 들렀다. 집주인이 사진관을 하였는데 정말 똑똑하게 생겼다며 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학교 다니지 못해 학생복을 입어보지 못한 백기완에게 사진으로나마 학생복을 입혀주었다) |
ⓒ 통일문제연구소 |
사선을 넘어 어렵사리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소년 백기완은 서울에서 학교에 가기는커녕 몸을 뉘일 집도 없었다.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다니다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이었고, 아버지와 헤어져 홀로 지낼 때도 많았다. 설렁탕집에서 일하다가 식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내쫓겼다. 미군 사무실이 있는 빌딩에서 승강기 안내 일을 하면서 미군 옷과 미군 모자(제복)는 입지 않겠다고 싸우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자전거포, 철공소, 공사장 잡부, 찹쌀떡 장수 등을 전전하면서 서울역에서 노숙했다.
굶주림에 시달렸던 백기완은 이때 길거리에서 평생 잊지 못할 스승을 만났다.
"1946년 겨울이었어. 열 네살 때지. 이름이 살구라고, 나랑 같은 거지인데, 그 새끼가 날 마구 놀리는 거야. 내 몸에서만 이가 나왔다는 거지. 자기도 거지고 나도 거진데 그게 말이 되냐고. 그놈이 나를 톡톡 박더라고. 내 코피가 터졌어. 그런데 내가 씨름을 하거든. 그놈을 버쩍 들어서 메다꽂고 때리려고 하는데 누가 나를 툭 쳐서 돌아보니 '가대기'(서울역 짐꾼) 형이야.
키가 180cm 정도 돼. 그의 아버지는 독립군이었는데 초등학교 입학도 못하고 병든 엄마를 모시며 사는데 지게로 짐을 져주고 몇 전 받는 사람이지. 이름은 몰라. 그 형한테 내가 '형! 이번엔 내가 이놈 이겼지?'라고 자랑스럽게 물었어. 그런데 그 형은 '야 인마, 가진 것이라고는 이밖에 없는 놈들끼리는 싸우면 코피만 터져. 싸움은 가진 놈들, 나쁜 놈들하고만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풀떡 한 개를 사주더라고. 그때는 기분이 나빴는데, 그 형이 항상 생각나."
훗날 백기완은 진보진영끼리 사소한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히며 분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릴 적 가대기 형이 했던 이 말을 떠올렸다고 한다. 가대기 형을 잊지 못해 1994년에 <단돈 만원>이라는 영화극본도 썼다.
해방 직후, 국내에서는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좌우익이 극한 대립을 했다. 194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김구 선생 등은 이에 맞서 통일정부수립을 추진했다.
아버지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도 일했다. 하지만 "사나이라면 취직하기 보다는 자연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기자를 그만둔 뒤에는 광산, 채석장 등 자연 개발에 매달렸다. 이때 열네 살 소년 백기완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의 연사로 나섰다. 아버지의 지인인 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지낸 현동완 선생이 독립운동가였던 조소앙 선생에게 소개한 게 계기가 됐다. 백기완은 10만 명 군중들 앞에서 홑바지 하나만 입고 추워서 떨다가 그만 아버지가 써 준 원고를 까먹었다고 한다. 소년 백기완이 얼떨결에 즉석에서 외친 대중 연설의 알맹이는 그가 평생 짊어지고 다녔던 화두, '통일'이었다.
"여러분, 하나가 되세요. 둘이 모이면 두 갈래, 셋이 모이면 세 갈래, 백이 모이면 백 갈래, 서로 갈기갈기 찢어져 통일독립을 이룩하질 못할 것이면 나는 여러분들을 도둑놈으로 몰겠습니다, 도둑놈. 도둑놈이 되고 싶으면 갈라서시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하나가 되셔야 합니다. 딴 거 없습니다. 이참 우리 겨레는 어찌 되었든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 1960년대 초 삼십대 초반의 젊은 백기완 |
ⓒ 통일문제연구소 |
눈이 허옇게 내린 들판을 가드래도 / 발걸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거라 / 왜냐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 뒤에 올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느니라
김구 선생은 그때 백기완을 무릎에 앉히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완아, 네가 크면 내 말을 알아들을 거다. 통일이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싸움이 아냐.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전 세계 침략자를 한반도뿐만 아니라 이 땅 지구에서 몰아내는 싸움이야. 기완아, 늙은 나에게 소련의 앞잡이다, 미국의 앞잡이다라고 중상모략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끄덕도 안 해.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싸움이 아니라니까. 너희 세대가 오면 통일은 모든 제국주의와 싸우던 양심이 하나 되는 것이라는 말을 동포와 백성들에게 말해다오."
이날이 김구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듬해인 1949년 김구 선생은 경교장에서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에 피살당했다. 백기완은 아버지와 함께 만나기 전에 이미 김구 선생을 알고 있었다.
"백범은 한마디로, 요만한 일에도 모두를 내놓는 분이야. 말만 내놓고 이따금 눈물만 보이는 분이 아니라 조그만 일에도 몽땅 다 내놔. 1946년도 겨울일 거야. 마포 강가에서 내가 거적때기를 쓰고 누워있었어. 강바람의 차가움은 그냥 겪는 바람과 달라. 그야말로 칼날이지. 여기저기서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죽어갔어.
그런데 어디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 곁눈질을 하니 웬 할아버지가 거적때기를 들쳐보곤 울고, 또 거적때기를 들쳐보곤 또 울고. 그러다가 갑자기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 누워있는 분의 얼굴까지 덮어주고 울면서 발길을 옮기더라고. 뭔가 와 닿는 게 있어서 그 분을 쫓아갔어. 알고 보니 백범 김구 선생이었어. 아, 저런 분을 두고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찬바람에 놀란 기럭 높이 떴고나/괴로운 나라 근심 잠 못 드는 밤/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치네
당시 우연하게 받아든 '성웅 이순신'의 소책자에 적힌 이 시를 보고 백기완은 이렇게 회고했다.
"서릿발 같은 기백이 번덕 번덕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아 어린 나를 그렇게 달굴 수가 없었어."
▲ 1987년, 쉰다섯 살. 민주시민대동제에서 연설하는 백기완 |
ⓒ 박용수 |
1950년 관악산 밑 승방틀에서 아버지, 형, 동생과 함께 살던 때에 6·25 전쟁이 터졌다. 백기완의 나이 열여덟이 되던 해에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 극한상황에서 목격한 수많은 군상 중 그가 생전에 또렷하게 기억했던 모습은 대부분 역경에 굴하지 않고 온몸을 던지는 민중들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6·25 전쟁 때 피난을 가는데 빗길에 내가 탄 차가 밀양 산골짝에서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어. 논바닥에 처박혀서 깨보니 뼈는 안 부러졌더라고. 사람 살려~ 라고 소리쳤지. 그런데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와. 그 사람은 열 아홉살 정도 된 색시를 안고 있었어. 총에 맞아 죽었대. 코 큰 놈들이 우리 색시가 예쁘다고 끌고 가려고 해서 돌멩이로 뒤통수를 깠대. 놈들이 총으로 쏴서 죽였어. 자기도 그 놈들에게 달려들어서 싸우다가 총에 맞았대.
그래서 세 식구가 죽게 됐대. 내가 놀라서 '아니, 두 분인데, 왜 세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색시 몸속에 애가 있대. 그러면서 자기 부탁 좀 들어 달래. 우리가 죽었지만 색시를 겁탈하려던 코 큰 놈들을 까고 죽었다는 말은 꼭 전해달라는 거야. 그러다가 죽었어.
그때 사내가 불렀던 게 '고모령'이라는 노래야.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나는 이 노래만 들으면 그렇게 기뻐. 색시도 까고 자기도 까다 죽었단 말이야.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이것처럼 기쁜 소식이 어디 있어. 기쁜 소식이라는 건 뭔가 이익이 된다거나, 바라던 것을 이루는 통속적인 것이 아니야. 아니, 사람을 발견했잖아! 까고 죽은 사람 말이야. 기쁨이란 이렇게 끊임없이 일깨우는 것이다, 이 말이야."
그 이듬해 가을까지 부산 제5육군병원(임시육군병원)에서 군복무를 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부두에서 고된 하역 일을 했고,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돈씨의 아들에게 영어도 가르쳤다. 당시 '해외유학장려회'를 만든 김상돈씨는 "너처럼 똑똑한 애는 전쟁을 피해 유학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며 첫 수혜자로 백기완에게 해외유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기완은 "싸우는 조국, 피 흘리는 겨레를 두고 나 혼자만 유학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백기완은 2년 뒤 부산 중앙일보에 "한국이 낳은 수재 '매시간 영어단어 백자를 암송'"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을 정도로 유명했고, 출세 길도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들었던 어머니의 말처럼 "네 배지(배)만 부르고 네 등만 따시고자 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6·25 전쟁으로 여덟 식구는 네 명씩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아버지, 작은 형님, 백기완, 누이동생은 남쪽에 있었고, 할머니와 어머니, 큰형님, 큰누이는 북쪽에 남았다. 백기완은 "우리 가족의 비극은 한 가족의 비극을 넘어 민족적, 역사적 비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백기완에게 분단의 아픔은 실체적으로 극복하고 싶었던 처절한 가족사였다. 백기완이 통일운동에 나선 이유이기도 했다.
▲ 1954년, 스물두 살, 전쟁이 끝난 직후 백기완은 벗들과 함께 <자진학생녹화대>를 결성하여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나무심기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 7년 동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강산에 2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고, 이어서 강원도 양양, 지리산 일대, 경기도 여주 등을 돌며 <자진농촌계몽대>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하며 젊은 날을 보냈다. |
ⓒ 통일문제연구소 |
1953년 스물 한살이 된 백기완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도시빈민운동을 벌였다. 남산 밑 후암동 산기슭에 천막을 쳐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름은 '채알(천막) 배움터'였다. 나중에 '달동네 배울(학교)'로 바꿨다. "비록 다 타버린 잿더미이지만 그 위에 눈이 하얗게 쌓이고 마침 달이 뜨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서 지은 말"이었다.
'달동네 새뜸(소식)'이라는 소식지도 만들어 배포했다. 그런데 '하꼬방'이 아니라 '달동네'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사상범으로 잡혀 일주일 동안 고초를 당했다. 백기완은 스무 살 청년 때부터 우리말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재야운동을 시작했던 것도 이때였다. 그해 봄에 한강 백사장에서 전쟁으로 불에 타 숯검정이 된 어느 젊은이의 죽음을 목격했다. 불에 탄 그곳에 목숨, 생명을 다시 살리자는 뜻을 세우고 나무심기 운동인 녹화운동을 결심했다. 청년 백기완은 <자진녹화대>를 조직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들이 낸 돈으로 7년 동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 산천에 나무 1백만 그루도 넘게 심었다고 한다.
1954년에는 <자진농촌계몽대>를 결성했다. 이승만 정권에 맞서려면 농민들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1961년까지 이승만 정권에 맞서서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나무심기운동과 함께 농민운동,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바라보라 붉은 산 햇볕에 탄다/들어라 힘차게 호미와 괭이를/저 산을 푸르게 마음도 푸르게/저 산을 푸르게 조국도 푸르게/영치기 영차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영치기 영차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우리는 선봉이다 자진학생녹화대(자진녹화대 _ 작곡 김광일/ 노랫말 백기완)
푸른 정 굽이굽이 넘쳐흐르던/농촌이 잠들다니 이게 웬 말이냐/수천 년 주림에 시달린 농촌/민족의 맥박이 끊어졌느냐/젊은이여 횃불 들어 암흑을 깨치라/영광스러운 내일을 바라보며/싸워나가는 우리는 하제(희망)에 찬 자진농촌계몽대
(자진농촌계몽대_ 작곡 김광일/ 노랫말 백기완)
백기완과 부인 김정숙 여사는 1956년에 첫 인연을 맺었다. 백기완이 당시 경기여고 강당에서 연설을 하면서 농촌 현장을 깨우쳐야 한다고 역설했을 때, 그 자리에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덕성여대 국문과 야간부에 다녔던 부인 김정숙 여사도 있었다. 그 인연을 이어가서 이듬해인 1957년 김정숙 여사와 결혼해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었다.
[백기완,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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